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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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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한국 사회

입력
2011.04.2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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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왕자> 부터 시작해서 <블랙 스완> 까지 수많은 동화와 설화 영화의 주제 중 하나가 변신이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 안에는 현실을 벗어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금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영화 <리플리> 에서 리플리가 원하는 것도 변신이었다. 부잣집 아들 디키를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데려오라는 임무를 맡은 순간부터, 상류사회의 일원인 디키를 만난 순간부터 리플리는 디키의 삶을 눈으로 빨아들이듯 바라본다. 디키를 동경하던 리플리는 결국 한적한 보트 안에서 디키를 죽인 후, 스스로 디키 행세를 하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가짜라고 믿고, 마음속 깊이 바라는 세계나 변신하고 싶은 사람을 진짜 자신이라고 믿는 현상을 <태양은 가득히>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학력위조 사건의 주인공 신정아 씨 역시 전형적인 리플리 증후군에 빠진 사람으로 보이는데, 위조된 예일대 학력을 끝끝내 진실로 받아들이고, 자서전에서도 자신이 예일대 동문임을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리플리 증후군이 있는 사람에게는 거짓말 탐지기도 소용 없다고 한다. 가공의 세계를 축조하다 보면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결국엔 자신의 거짓말이, 거짓의 세계가 진짜가 돼버리는 것이다.

신정아 씨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 선거전을 치르는 후보들이나 정치인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리플리 증후군에 빠져 버린 것같이 보인다. 한때는 본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앵커로서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진보적 인사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여당 소속의 정치인. 각종 비리사건을 둘러싸고 벌이는 진실 게임의 당사자들. 스캔들이 분명한데도 덩 여인과 사랑을 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상하이 사건의 고위 관리. 이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한 끝에, 현실의 모순을 거짓으로 메워 버리고 그 거짓을 진실로 믿는 '바보'로 변해가 버린다.

리플리 증후군은 특히 개인의 사회적 성취욕은 큰 데 비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는 경우 더 빈번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처럼 학벌과 인맥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성적 스캔들이 사랑으로 둔갑하고, 없던 학벌과 정치색과 인맥이 생겨나 자신은 이런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리플리 씨들은 점점 번성할 예정이다.

문제는 그런 리플리들을 우리가 정말 믿어 준다는 것이다. 리플리가 보여주는 멋진 모습이 마음속 깊숙한 욕망과 부합될 때, 우리는 리플리가 가장하는 멋진 신세계를 검증 없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리플리는 디키와 달리 자신을 순수하게 좋아해 주고 믿어준 피터에게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하자, 결국 그를 죽이고 만다. 진짜 모습을 보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배우 맷 데이먼이 분한 리플리는 영화 속에서 끝끝내 초라한 현실보다 멋진 거짓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리플리 씨에게 속아간 국민들은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다. 현실에 직면하지 못하기는 리플리나 리플리에게 속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때론 현실은 혼란스럽고 초라하다. 때론 현실은 가혹하고 문제투성이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끔 자신의 기억을 변형한 거짓의 세계에 몸 담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틋하게 실패한 연애담도 2번 이상 반복될 때는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합리화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 그곳에서 '재능 있는' 리플리 씨들이 오늘도 거짓말의 먹이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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