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연초부터 독과점 성격이 강한 정유와 통신산업의 불합리한 가격구조를 뜯어고치겠다고 공언해왔다. 관료들의 진심이었다기보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국민들의 기대는 '역시나'로 바뀌고 있다. 기름값 인하는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는 비아냥만 들은 채 마무리됐고, 통신요금 인하도 비슷한 경로를 밟아가고 있다.
민관 전문가로 꾸려진 통신요금 태스크포스(TF)가 5월 중 요금 인하방안을 내놓기로 한 가운데, 정책당국의 최고 책임자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최근 "기존 통신비 개념이라면 이명박 대통령의 통신비 20% 인하(공약)는 이미 달성했다고 본다"며 재를 뿌렸다. 스마트폰 보급으로 이용 용도가 다양해진 만큼 통신요금이 올라간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때문에 시장에서는 통신비 인하가 물 건너갔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정책 왜곡하는 검은 커넥션
해묵은 이슈지만, 소화제 감기약 등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된 가정상비약을 슈퍼 등에서 판매토록 하는 문제도 언제 결론이 날지 모른다. 이명박 대통령이 외국의 사례를 직접 거론하며 '소비자 편의'를 강조했는데도 보건복지부는 요지 부동이다.
국민 절대 다수가 원하고 합목적성이 인정되는 정책인데도 표류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반드시 이것 때문이라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꽤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다. 관료와 기업(이익단체) 간 유착이다. 기업들은 '대외업무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퇴직 관료를 영입하지만, 공직 인맥을 활용해 정부 정책에 대응하려는 의도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예컨대 통신업계를 보자. 통신은 대표적인 규제 산업이다. 정부의 요금 정책, 주파수 정책에 따라 연간 수천억원의 이익이 왔다갔다 한다. 통신시장의 대표기업인 KT와 LG텔레콤의 수장이 정보통신부 장관 출신이고, SK텔레콤 등의 대외업무 부서에도 정통부 출신 고위 관료가 대거 포진해 있다. 이들은 통신정책을 함께 입안했던 선ㆍ후배 공직자들과 유착돼 업계 논리를 적극 대변한다. 공익보다 업계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이 양산되는 이유다.
참여연대가 2001년부터 2006년 5월까지 건설교통부 5급 이상 퇴직 관료 111명을 조사한 결과, 전체의 40.5%가 건설회사나 건설단체 등에 재취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퇴직일과 재취업일이 일치하거나 퇴직 열흘 만에 이익단체 임원으로 변신한 사례도 있었다. 이들이 동분서주하며 친정 부처에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 분양원가 공개 반대, 미분양 아파트 혈세 매입 등 건설업계에 유리한 정책들이 속속 실현됐다는 게 시민단체의 분석이다.
올 들어 영업 정지된 저축은행 8곳 중 3곳의 감사가 금융감독원 출신이다. 부산저축은행그룹은 최근 3년간 기획재정부 금감원 등의 관료 출신 8명을 이사ㆍ감사로 영입했고, 도민저축은행은 전직 경찰청장과 국가정보원 차장이 이사ㆍ감사직을 지냈다. 감사가 경영진의 비리를 감시하고 금융사고 위험을 예방한다는 얘기는 교과서에만 존재할 뿐이다. 유능한 감사 소리를 들으려면 금융비리가 터졌을 때 감독당국에 로비해 덮을 수 있어야 한다.
관료와 업계의 검은 커넥션은 전 공직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익단체 상근부회장은 십중팔구 관료 출신이라고 보면 된다. 현직이라고 다를 게 없다. 퇴직 후 일자리를 보장받기 위해 업계의 이익을 적극 옹호한다. 약값 인하에 반대하던 고위 관료가 제약협회 임원으로 옮겨가고, 감독 대상 기업의 뒤를 봐주던 관료가 해당 기업의 감사로 옮겨가 감독기관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게 현실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퇴직 관료의 사익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구조를 언제까지 방치할 텐가.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하나
제도(공직자윤리법)가 유명무실하고 대통령도 관료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국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이달 중순 결성된 '가정상비약 광주시민연대'는 23일 거리 서명운동에 돌입한다. 수도권과 충청 등지에도 곧 가정상비약 시민연대가 결성될 예정이다. '통신비 인하 시민연대', '분양가 인하 시민연대'도 꾸려야 한다. 관료와 기업의 공고한 먹이사슬이 공익을 위협하고 있는 게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대한민국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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