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비현실적 단일통화의 역습…커지는 재정난·양극화 진퇴양난
독일의 지방 소도시 레겐스부르크. 한 무리의 독일인들이 야외카페에 모여 앉아 며칠 전(6일) 포르투갈의 구제금융 신청 소식을 화제에 올렸다. 분위기는 냉랭했다. 토마스 첼러씨는 "매번 유럽연합(EU)에 기대지 말고 서로들 돈을 모아 해결하게 해야 한다"며 그리스 아일랜드 등 구제금융 국가들을 싸잡아 성토했다.
이날 지역신문에는 돈다발을 쥔 여성(EU)과 춤을 추며 손을 내밀고 있는 남성(포르투갈)을 그린 '값비싼 탱고'라는 제목의 만평이 실렸다. 구제금융을 바라보는 독일인들의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유럽은 지금 심각한 역내 빈부갈등에 몸살을 앓고 있다. 자국의 세금으로 남의 나라를 돕기 싫다는 부자나라들의 여론과, 부자나라들 위주의 금융정책과 시장이 자국의 빚을 더욱 늘렸다고 여기는 재정위기 국가들의 민심이 정면 충돌하는 양상. 이들의 표심이 각국 정치지형을 위협할 정도로 거세지면서 재정위기는 단순한 경제위기를 넘어 체제의 위기로 번지고 있다.
위기감은 최근 회원국들의 선거 결과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지난 17일 핀란드 총선에서 포르투갈 지원 반대를 표방한 극우 성향의 '진짜 핀란드인당'이 일약 3위 득표(19%)를 한 것이 대표적 사례. 독일도 지난해 메르켈 정권이 그리스 구제금융 방침을 밝힌 직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바 있다. 앞으로 구제금융의 밑천을 대야 할 부자나라 유권자들의 이런 정서는 재정난 극복을 위한 공동대응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난 ING의 카르스텐 브르제스키 이코노미스트는 "현 유럽의 위기는 순수한 부채 문제라기보다 정치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EU 경제가 지닌 태생적 한계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재정난의 근본 원인을 '무늬만 단일 통화'인 유로화 체제에서 찾는다. 환율은 '경제의 거울'인데, 경제체력이 다른 국가들이 같은 통화를 사용하다 보니 회원국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실제 1999년과 2008년을 비교했을 때, 독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비중은 -1.3%(적자)에서 6.7%(흑자)로 급증한 반면, 스페인은 -2.9%에서 -9.7%까지 크게 추락했다. 제조업 강국인 독일로 역내 교역의 과실이 모두 쏠렸다는 얘기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애초에 단일통화가 부적합했던 만큼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각자 통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올 정도다. 그나마 EU를 유지한 상태에서의 대안으로 ▦각국의 재정정책까지 중앙집권화하는 '재정연방주의' 도입 ▦각국 독자통화를 부활시켜 유로화와 병용하는 방안 등이 제시되고 있지만 역시 복잡한 회원국들의 이해관계를 감안하면 현실성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당장 유럽 경제는 앞으로 두 개의 큰 산을 넘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재정난 확산 저지. 무엇보다 PIGS국가(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재정위기 4개국) 중 하나로 포르투갈에 채권이 많은 스페인이 버텨줘야 한다. 역내 4위 경제대국인 스페인이 무너진다면, 유럽재정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번질 수 밖에 없다는 분석.
유럽위원회(EC) 경제통화국 아마데우 타디오 대변인은 "스페인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여건이 괜찮은 편이지만 부동산 버블과 20%에 달하는 실업률은 여전히 큰 부담"이라고 우려했다.
중장기적으로는 EU 체제의 구조적 한계, 나아가 이번 재정난 후유증이 필연적으로 불러 올 만성적인 난제들과도 싸워야 한다. 긴축을 필수 요소로 삼는 재정위기의 특성상 유럽은 향후 '재정위기→실물경기 침체 및 유로화 약세→양극화 심화→재정위기 악화'의 악순환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종규 수석연구원은 "EU는 지금 앞으로 나가기도, 뒤로 물러나기도 어려운 딜렘마에 빠져 있다"며 "당분간은 구제금융 국가들에게 강력한 긴축ㆍ개혁안을 촉구하면서 유로존이라는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버티겠지만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제도적 보완이 늦어진다면 장기간 '힘 빠진' 유럽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브뤼셀ㆍ레겐스부르크=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 한스 마르탱 유럽정책센터 소장 "저출산·고령화가 또 다른 위험 요소"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유럽정책센터 한스 마르탱(사진) 소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닥칠 인구구조 변화 또한 EU가 극복해야 할 커다란 위험요소"라고 경고했다. 그는 "지금 상태라면 유럽은 죽어가는 대륙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인구 변화가 얼마나 심각한가.
"저출산ㆍ고령화 현상은 유럽의 미래에도 심각한 문제다. 단적인 예로 유럽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독일 인구가 현재는 유럽 내 1위(8,200만명)지만 2060년에는 영국, 프랑스에 이어 3위(7,000만명)로 주저 앉을 전망이다. 독일의 경제활동 가능 인구(15~64세)는 올해를 100으로 봤을 때 2060년에는 70 정도까지 줄어들 전망이다. 그만큼 경제의 동력이 약해진다는 의미다."
-독일만의 문제는 아닐텐데.
"유럽연합 전체로도 2060년에는 경제활동인구가 현재의 80% 수준까지 줄어든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이민정책 등으로 버티겠지만 향후 상당한 경쟁력 저하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젊은 층이 져야 할 부담도 커질 듯 싶다.
"미래 세대의 부담은 상상을 초월한다. 폴란드 같은 나라는 현재 젊은 층이 소득의 40% 정도를 노인층 부양에 쓰고 있으나 2060년에는 90%를 쏟아 부어야 한다. EU 전체로도 이 비율은 50%에서 80%로 크게 뛸 전망이다."
-대책은 없나.
"가장 확실한 대책은 출산율 향상이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보다 적극적인 이민 수용이나 은퇴연령 연장, 생산성 제고 같은 보완책은 시도해 볼 수 있겠지만 이 역시 회원국들의 이해가 달라 정치적으로 합의를 이루기 쉽지 않을 것이다."
브뤼셀=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강력한 구심점이 없다" 정책 결단 못해 위기 대처 늦어
EU는 역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초(超)국가적 공동체. 회원국이 주권 일부를 EU에 위임해 공동정책을 추진해가는 구조다. 그러나 경제통합이 상당히 이뤄진 데 비해 정치통합 정도는 아직 미약해, 경제에 닥친 위기를 정치적 결단으로 풀어나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은 주권국 대통령이나 총리같이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구심점이 없다는 것. 나름의 행정부와 의회를 보유하고 있지만 현재로서 EU 본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 예산은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 정도에 불과한 점을 봐도 그렇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EU정상회담 참석과 관련, ▦순회의장국 정상 ▦정상회의 상임의장 ▦집행위원장 중 누가 EU를 대표할지를 두고 혼선을 빚은 것은 불명확한 EU의 현 지배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정책 결정 과정이 복잡할뿐더러 27개나 되는 나라의 공통 이해관계를 도출하는 일도 쉽지 않다. 예컨대 최대 부국인 독일과, 아직 차우셰스쿠 독재의 부작용을 벗어나지 못한 루마니아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 없다. 한ㆍEU FTA가 자동차에 민감한 이탈리아의 반대로 비준이 늦어진 것도 이런 차원이다
17개국이 한 통화를 쓰면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도 있다. 한 나라에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하는 경우 고유통화가 있다면, 통화가치의 절하(인위적 환율상승유도)을 통해 적자를 줄이고 경기를 부양할 수 있겠지만 단일통화를 쓰니 이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환율정책이 불가능하고, 통화정책도 유럽중앙은행(ECB)이 담당하다 보니 각국 정부로선 유일한 정책수단이 재정정책뿐이다. 모든 거시경제 쟁점을 재정정책으로 풀어가야 하는 상황인 셈. 그러나 선거로 뽑히는 정부가 쥐고 있는 재정정책은 그 성격상 긴축보다는 팽창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재정정책으로 현 재정위기를 벗어나야 하는 게 그만큼 힘들 것이란 얘기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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