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러 왔습니다.”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오겠다는 거야.”
4ㆍ19혁명 51주년을 맞은 19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ㆍ19민주묘지는 오전부터 아수라장이 됐다. 독재와 부정부패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선열을 기리는 뜻 깊은 자리에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도 난무했다. 이날 충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 등 이 전 대통령의 유족들이 묘지를 찾아 참배하려는 것을 4ㆍ19혁명 희생자 관련단체들이 저지하면서 시작됐다.
오전 8시45분. 이 박사와 사단법인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원들이 탄 소형 버스 1대가 국립묘지에 진입하자 희생자 관련단체 회원 10여명이 길을 막고 나섰다. 오도가도 못한 이 박사는 버스에서 내려 “민족적 화합을 이루고자 왔다. 사과할 기회를 달라”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도 4ㆍ19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며 “사죄의 뜻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희생자 관련단체 회원들은 강경했다. 이 박사를 둘러싼 회원들은 돌아갈 것을 강력히 요청했고 이 박사는 취재진과 일부 회원들에 떠밀려 휘청거리기도 했다. 결국 이 박사는 묘지를 코앞에 두고 정문 밖에 대기해있던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기념사업회 김일주 사무총장은 “우리의 의사표시를 할 만큼 했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야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이 박사와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퇴장했지만 희생자 단체 회원들은 여전히 격앙된 표정이었다. 오경섭 4ㆍ19민주혁명공로자회 회장은 “이번 충돌은 그쪽에서 자초한 일이다. 분명 사과를 거부하고 입장도 제지하겠다고 밝혔는데도 일방적으로 온 건 예의에 어긋난다”며 “정신적 테러를 당한 기분”이라고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고려대 재학 당시 4ㆍ19혁명에 참가했다는 강기태(75)씨는 “제사 지내려는데 고인을 죽인 사람이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각에선 참배 자체를 막은 건 심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왕성원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장은 “4ㆍ19단체라도 공식 사죄에 대한 반응은 다들 제 각각이더라. 이제 용서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고 사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 기념식이 열린 4ㆍ19기념탑 앞 광장에서는 이 전 대통령 유족의 공식사죄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 희생자 관련단체 회원들끼리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한 회원이 “(사과를) 이해해줘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을 하자 반발한 회원들이 언성을 높였던 것. 한바탕 소동에도 불구하고 이날 51주년 4ㆍ19혁명 기념식은 큰 차질 없이 마무리됐다.
한편 이인수 박사는 이날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ㆍ19 희생자 묘역 참배와 사죄 성명 발표를 희생자 단체들이 저지한 데 대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매우 유감스럽지만 그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또 “더 늦기 전에 역사의 잘못을 사죄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 저와 기념사업회의 간곡한 뜻임을 그분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사죄가 진정성이 없고 갑작스럽다’는 4ㆍ19단체들의 비판에 대해 “미리 교감을 하지 못한 건 잘못”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일고 있는 이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에 대해서도 “국민 열망에 따라 건립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 희망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기념사업회 김일주 사무총장은 “지금은 화해 시도를 막 시작한 단계이므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잘 되리라 믿는다. 희생자 유족들과 교감을 넓혀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송옥진 기자 click@hk.co.kr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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