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 1995년 개봉한 브래드 피트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가을의 전설’의 원제는 ‘Legends of The Fall’이다. 가감 없이 원래 제목을 제대로 살린 듯하지만 알고 보면 국내 개봉 제목은 영화 내용과 거의 무관하다. 미국 한 가문의 몰락을 그려 낸 이 영화의 내용을 감안하면 ‘Fall’은 가을 대신 몰락이라 해석해야 옳다.
‘가을의 전설’은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당시 마케팅 담당이 원제만 보고 만들어 낸 제목. 내용과 다른 제목이었지만 가을과 전설이라는 그럴듯한 두 단어가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며 관객의 감성을 자극했다. 계절과 별 연관 없는 이 영화는 가을이 되면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자리매김까지 했다(‘가을의 전설’은 초봄에 개봉했다).
외화의 국내 개봉 제목을 어떻게 바꾸냐는 영화 관계자들의 영원한 숙제다. 별 힘 들이지 않고 지은 제목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반면, 정성 들인 제목이 되려 흥행의 독으로 작용한다. 최근엔 원제와는 거리가 먼 창의적 제목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원제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흥행에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더 브레이브’가 대표적 사례. 원제가 ‘True Grit’인 이 영화는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969년 존 웨인 주연의 ‘진정한 용기’로 스크린에 옮겨졌던 작품이다. ‘진정한 용기’는 ‘True Grit’을 직역한 제목이다.
‘더 브레이브’는 원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한국식 영어 제목. 수입사는 “‘진정한 용기’는 한국 영화 느낌이 나고 ‘True Grit’은 좀 낯선 영어라 새로운 제목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원작 소설은 영화 개봉 즈음 ‘True Grit’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유야 어쨌든 영화와 소설이 마케팅에서 시너지 효과를 누릴 기회를 잃은 셈. 국내 영화 전문 케이블TV는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 중계 때 ‘True Grit’(‘더 브레이브’)이라는 자막을 방송에 활용했다.
원제가 ‘Another Year’인 ‘세상의 모든 계절’도 아쉬움이 남는 제목.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1년에 걸쳐 소개하며 인생의 보편적 모습을 포착한다. 원제의 뜻을 살리기 쉽지 않았겠지만 92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아류 느낌을 주고 말았다.
5월 5일 개봉하는 ‘사랑을 카피하다’의 제목 수난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줄리엣 비노쉬)을 수상한 이 영화의 원제는 ‘Certified Copy’. ‘공인된 가짜’로 해석될 수 있는 제목. 이탈리아 투스카니에서 우연히 만난 베스트셀러 작가와 한 여성 팬이 부부인척 행동하다 사랑의 감정에 빠져드는 과정을 반영했다. 이 영화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첫선을 보일 때의 제목은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증명서’. 결국 ‘사랑을 카피하다’라는 제목으로 개봉하면서 부산영화제 상영과 줄리엣 비노쉬의 방한이라는 혜택을 크게 얻지 못하게 됐다.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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