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마시다 보면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수다쟁이가 되고, 무뚝뚝하던 사람이 나긋나긋해진다. 술은 물질도 변화시킨다. 철과 텔루륨이 섞인 화합물을 술에 넣으면 특별한 성질이 나타난다. 바로 초전도 현상이다.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위스키 사케 맥주에서 모두 마찬가지다.
이 달로 초전도 현상이 발견된 지 꼭 100년이 됐다. 초전도 현상은 영리하게도 정체를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았다. 야금야금 조금씩 자신을 보여줘 왔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과학자들은 초전도에 매달린다. 분명 뭔가 더 나올 것 같아서다.
산업화 쉽지 않은 이유
술에서 초전도 현상이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2008년 일본에서다. 특히 레드와인이 가장 훌륭한 초전도체를 만들어냈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과학자들은 술에 들어 있는 산화물이나 항산화 성분의 화학반응 때문일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다. 실험을 위해 술에 담근 철-텔루륨 화합물이 초전도체가 된다는 것 역시 놀랄만한 사실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띠는 물질은 초전도 현상을 보이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철은 쉽게 자석이 된다. 철 초전도체에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또 다른 이유는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초전도 현상이 처음 발견된 건 1911년 4월 수은에서였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오너스가 액체헬륨으로 수은의 온도를 4.2K(켈빈, 0K=-273.15℃)로 낮추자 전기저항이 사라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전기가 영원이 흐를 수 있는 상태다. 산업화하면 많은 양의 전기를 싸게 공급할 수 있을 터. 수많은 과학자들이 너도나도 이 매력적인 현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산업화는 쉽지 않았다. 걸림돌은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온도가 너무 낮다는 것.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1987년 풀리는 듯했다. 비싼 액체헬륨 말고 싸고 풍부한 액체질소로 97K(-176.15℃)에서 초전도 현상을 나타내는 물질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액체질소의 끓는점(77K, -196.15℃)보다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체 현상을 나타내는 물질을 고온초전도체라고 부른다. 현재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최고 온도는 138K(-135.15℃)까지 높아졌다. 첫 발견 때보단 크게 올랐지만 산업화하기엔 그래도 여전히 낮다.
상온에서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물질이 발견된다면 아마 과학계가 발칵 뒤집힐 게다. 별도의 냉각이 필요 없으니 초전도 현상을 싼 값에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아바타'에서 비슷한 상황이 묘사됐다. 인간들이 판도라 행성에 묻혀 있는 희귀금속을 차지하려고 나비족과 싸우는 상황 말이다. 그 희귀금속이 바로 상온초전도체다. 영화 속에서 판도라 행성이 공중에 붕 떠 있는 설정도 초전도와 관련 있다. 초전도체 내부에 전류가 흘러 생기는 유도자기장이 초전도체 외부의 자기장과 서로 밀어내는 현상을 보여주는 설정이다.
자기부상열차가 선로 위에 붕 떠서 이동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열차 바닥에 붙인 초전도체가 만드는 자기장과 선로에 설치한 자석이 만드는 자기장이 서로 밀어내기 때문에 열차가 선로에 닿지 않고 공중에 뜬 채 달린다. 홍계원 한국초전도학회장(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열차 내부에 설치된 냉각장치가 초전도체를 약 4.2K(-268.95℃)로 계속 유지해야 열차가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벨상 유력 후보
일상 생활에서 가장 쉽게 초전도 현상을 볼 수 있는 곳은 병원이다. 초전도체는 전기저항이 없으니 전류가 많이 흐를 수 있다. 주변에는 그만큼 강한 자기장이 생긴다. 초전도체로 형성된 강력한 자기장 안에 환자가 들어가면 전자파를 쏴 몸 속 수소원자와 반응하는 신호를 잡아내 영상으로 만드는 장치가 바로 자기공명영상(MRI)이다.
초전도체를 어디서나 값싸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우리 생활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휴대전화로 오랫동안 통화하면 점점 뜨거워진다. 전기에너지가 손실되면서 열에너지로 바뀌기 때문이다. 초전도체는 전기저항이 0이기 때문에 전기에너지 손실이 없다. 초전도체로 만든 휴대전화는 뜨거워질 일이 없다. 발전소에서 전기를 내보낼 때도 저항이 없는 초전도 전선을 쓰면 보통 구리 전선보다 많이 전달된다. 오상수 한국전기연구원 초전도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연구팀은 최근 "같은 굵기의 구리 전선보다 170배가 넘는 전류를 보낼 수 있는 초전도 전선을 개발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전력 저장 용량 역시 초전도체가 다른 물질보다 월등하다. 작은 부피에 많은 양의 전력을 담아둘 수 있기 때문에 들고 다니기 편한 고성능 무기 개발도 가능하다. 초전도 양자컴퓨터도 등장할지 모른다. 지금의 컴퓨터는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신호가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기본 단위? 양자컴퓨터는 0과 1이 다양하게 섞인 중첩신호를 단위로 쓰기 때문에 처리용량이 훨씬 커진다. 그런 중첩신호를 구현할 수 있는 유력한 물질이 바로 초전도체다.
하지만 자기부상열차나 MRI 말고는 여전히 미래 얘기다. 별도 냉각장치 없이 작동하는 상온초전도체가 아직 없고,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원리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둘로 나뉘었다. 초전도 분야는 여전히 밝혀질 게 많은 보물섬이라는 시각이 여전히 우세하지만, 한편에선 초전도 연구가 한계에 다다랐다든지, 상온초전도체가 있을 리 없다든지 하는 비관론이 나온다. 지금까지 상온초전도체를 발견했다는 주장들은 여럿 있었지만, 모두 학계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처음 발견된 지 100년이 흐른 지금, 초전도 연구는 전환점에 섰다. 획기적인 기술이 등장해 본격 상용화 흐름을 탈지, 그저 흥미로운 과학적 현상으로만 남을지 말이다. 그 길을 제시할 과학자는 아마 노벨상의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초전도(超傳導)
금속이나 합금에서 전기저항이 없어져 전류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흐르는 현상. 물질마다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온도가 다르다. 현재까지이현상이 발견된 최고온도는 -135.15℃로, 상온 초전도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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