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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보릿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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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보릿고개

입력
2011.04.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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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요즘 젊은이들이 이영도 시인의 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찔레순 삘기 아까시꽃 감꽃 등으로 긴긴 봄날의 허기를 채운 세대에겐 춘궁기, 보릿고개 시절의 아득한 배고픔을 절절하게 떠올리게 하는 절창이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하거나, 그조차 없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아서 태산보다 넘기 힘들다는 보릿고개였다.

■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 추진되고 통일벼 등 다수확 품종이 도입되면서 우리는 단군이래 숙명과도 같았던 보릿고개에서 벗어났다. 보릿고개란 낱말은 이제 사전 속에나 있고, 일부 지자체가 '보릿고개 마을''보릿고개 체험장' 등의 간판을 내걸고 웰빙 먹거리나 향수 체험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나머지 절반 북한은 사정이 다르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혹독한 보릿고개가 매년 되풀이 되고 있다. 보릿고개의 절정인 5, 6월, 대부분의 북한 농촌 주민들은 논밭이 아니라 산으로 올라간다. 풀죽을 끓여 먹을 산나물과 풀을 캐러 가는 것이다.

■ 옥수수 가루에 산나물을 넣어 쑨 풀죽 한 두 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가구가 태반이라고 한다.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설도 파다하다.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얼마 전 영국을 방문해 "60년 만의 최악 한파와 지난해 작황 부진으로 앞으로 두 달이 고비"라며 식량지원을 호소했다. 유례 없는 봄 가뭄까지 겹쳐 상황은 악화일로다. 세계식량계획(WFP) 등은 현지조사를 통해 취약계층 610만 명 분의 식량 43만4,000톤의 우선 지원을 촉구했다. 5대 종단 대표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대북식량 지원촉구 대열에 가세했다.

■ 우리 정부만 요지부동이다. WFP 실태조사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쪽박만 깨는 꼴이다. 미국 조야에서는 보릿고개를 넘기지 않고 식량을 보내려면 이달 내로 지원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한국정부의 완강한 반대가 변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어제 한국을 다녀간 클린턴 장관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북한 정권의 태도 변화와 분배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식량 지원이 늦어지면 고통을 당하는 쪽은 김정일 정권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이다. 솔로몬 재판에서 아이의 배를 가르자고 한 비정한 가짜 어미가 생각난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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