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슨의 창업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의 불장난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불장난을 냉혹하게 바라보았다. 당연히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던 투자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벤처기업특별법도, 코스닥도 없었다. 벤처의 양대 인프라인 벤처기업특별법과 코스닥은 그로부터 10년 후에 필자가 설립하는 벤처기업협회가 주도가 되어 만들어지게 된다.
한마디로 벤처투자 인프라는 당시에는 극히 취약했다. 물론 창업투자회사들이 존재했으나, 죄송하지만 대부분 무늬만 벤처투자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실제로 투자는 하지 않고 융자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사업을 시작했으니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주변을 설득해 개인 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요즘 얘기하는 소위 엔젤 캐피털리스트를 끌어들이자는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었다. 도일시스템, 이장우 박사(현 경북대 교수) 등이 그 '희생양'들이 됐다.
그 과정을 보면 "제가 이번에 첨단기술회사를 설립하는데, 투자할 기회를 드리지요" "투자 조건은?" "1,000만원을 투자하면 액면가 500만원 지분을 드리지요." 소위 프리미엄 할증투자라는 얘기였다.
할증투자의 논리는 기술을 투자하는 우리 연구원들의 지분 부담을 자본만 투자하는 사람들이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투자해주는 것만해도 고마운 것이었는데, 할증투자를 하겠다는 배짱에 여러 사람들이 알고도 넘어가 줬다.(이 분들은 10년 후 메디슨 상장 이후 수십 배의 수익이라는 복을 받았다)
다음 목표는 벤처투자 전문회사들이었다. 여러 벤처캐피털을 설득했으나 상대가 GE, 지멘스 라는 데 대략 물러섰고 남은 것은 지금의 KTB의 전신인 KTDC였다. KTDC는 특별법에 의하여 전국경제인연합회와 과학기술부가 설립한 특수법인으로서 당시 최고의 실력가들이 김창달 사장의 지휘하에 포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메디슨 상장 이후 KTDC는 이민화의 사업 설명을 듣고 즉각 투자결정을 했다고 언론에 얘기했으나 사실은 투자와 융자를 합쳐 2억원의 의사 결정에 무려 6개월이 걸렸음을 알려드린다. 당시 서갑수 부장(전 KTIC 회장)의 "박사 학위 하나에 1억원은 되지 않겠느냐"는 '엉뚱한' 논리에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드디어 개인 투자가와 KTDC의 투자로 최소한의 자금은 준비가 됐다. 그 자금이라는 것은 당시 초음파진단기 10대를 사면 없어지는 규모였으나, 철모르는 기술자들은 마냥 꿈에 부풀었다. "벤처가 벤츠를 타느냐, 벤치에 앉느냐 그것이 문제다"라는 우스개 소리를 해대면서….
이제 사업을 시작해야 했다. 우선 필자 개인의 법적 지위가 문제가 됐다. 사업을 시작한 사업가인데, 카이스트의 국비 장학생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해당 학생 이민화, 소속 기관장 이민화라는 이상한 서류를 만들면서 지원받은 국비 전액을 상환했다.(이 규정은 아직도 부분적으로 남아 카이스트의 창업활성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때까지 사업을 후원한 남북의료기에도 9,000만원이라는 투자금액 전액을 지급하고 일체의 권리를 이양 받았다. 이제 법적으로 재무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준비는 끝났다.
창업을 한 그 해 9월에 키메스라는 의료기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입수하고 전시 참가를 결정했다. 1명의 여직원이 먹여주는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두 달간 밤샘 작업 끝에 전시 시작일 새벽에 간신히 끼워 맞추어 출품했다. 모두들 이틀간 곯아 떨어져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시회의 성과는 참담했다. 의사들은 질문했다. "이게 무슨 기계지요." 우리는 설명했다. "첨단 초음파진단기입니다." 의사들의 반응은 "흠, 초음파 비슷하기는 한데…" 결국 우리는 초음파진단기 비슷한 기계만 전시했던 것이다. 초음파진단기는 아니고.
세계 시장의 벽은 너무 높았다. 모두들 모여 고민을 했다. 여기에서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전진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못 먹어도 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생존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전략1: 정면 승부는 피하자. 경쟁자가 오면 우리는 숨는다 ▦전략2: 경험 있는 고객에게는 판매하지 않는다 ▦전략3: 모르는 고객을 가르쳐서 팔자. 만들고 나서 보니, 누군가가 말했다. 중국의 마오쩌둥 전략과 흡사하다고.
영업 첫해 우리는 대한민국의 산간 벽지로 파고 들었다. 전남 여수 진도 해남, 경북 청송 등 경쟁자가 오지 않는 시장에서 근근이 연명을 했다. 당시 우리 제품의 별명은 신기루 초음파였다. 화면이 보이다, 보이지 않다 발로 차면 또 보이는 그런 수준의 제품이었다. 그래도 사후 서비스는 열심히 했다. 고장 신고가 들어오면 서울에서 밤새 여수로 내려가 원장님 출근 전에 병원 문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기다리는 메디슨 직원을 나중에는 식구로 받아주는 단계로 돌입했다.
문제를 통해 감동을 시킨다? 메디슨의 출발은 이렇듯 시련의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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