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의 특수효과를 위해 스태프들은 원통을 굴리고 널을 뛰고 엄동설한 찬 물에 온 몸을 던져야 했다. 그런 수동식 특수효과(?)를 연출 해내는 과정에서 유독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몸을 아끼지 않고 잘 해내던 어린 청년이 있었다. 바로 임권택이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지만 그 때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 청년이었다. '장화홍련전'에 공동 투자한 임 사장이라는 분이 이 청년을 데리고 와서 "아무 거나 일을 좀 시켜줬으면 좋겠다"해서 합류하게 된 청년, 아니 요샛말로 정확히 말하면 가출청소년이었다.
우리 연출부는 이미 모든 인원이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출부에 합류시킬 수 없었다. 진행부나 조명부, 소도구 담당 등 손 필요한 곳이면 눈치껏 닥치는 대로 일을 해보라고 했다. 통행금지가 오전 네 시까지 이어지던 그 시절, 별 기대 없이 받아준 이 어린 청년은 오전 다섯 시만 되면 회사에 나와서 열심히 일을 거들고 묵묵히 일하기에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중퇴에 가출청소년이었던 임권택이었지만 그 성실함을 나는 높이 샀다. '얘는 내가 키워주면 좀 도움이 될 수 있는 청년이구나' '혼자서 어떻게 키워보겠다. 제대로만 자라면 내 연출부로 끌어들인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평소 물건을 가져와 놓을 때 보면 손을 떠는 것이었다.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때만 되면 쟤는 술을 너무 마십니다"라는 얘기도 들렸다. '젊으니까 가끔은 그럴 수도 있겠지' 생각했는데 "하루도 안 빠지고 술을 그렇게 마십니다"는 말이 들려왔다. '얘가 술을 마실 만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권택이를 불렀다.
"술을 그렇게 마시지 말고, 그 시간에 독서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하며 조심스럽게 충고하였다. 권택이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으니 독서를 많이 해야 그나마 연출부의 구성원으로써 혹은 자신을 위해서도 뭔가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에서 비롯된 충고였다. 그 후 자주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친구가 그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임권택이 술을 많이 마시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았고 그의 괴로움이 깊이 이해되었다. 부모가 빨치산의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당시의 연좌제 때문에 여러모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감수성 예민한 나이였으니 술로 세월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술로 버텨내던 어려운 시절, 불행 중 다행히도 내 쓴 소리를 받아들여 많은 책을 탐독하게 되었고 독학으로 오늘날의 임권택이 된 것이다. 다들 대학 나오고 유학 다녀와도 될까 말까 하는, 녹록지 않은 연출을 마침내 혼자 힘으로 해낸 것이다.
데뷔작 '깃발 없는 기수'부터 '장군의 아들'까지 임권택 감독의 작품 면면이 모두 완성도와 흥행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서편제'는 특히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임 감독이 '천년학'이후 몇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임 감독에게 그 아쉬운 점을 충언할 수 있는 영화감독이 극히 드물 것이라 생각될 뿐만 아니라 명실공히 임 감독의 스승이기에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관객은 1993년 '서편제'를 중심으로 큰 분기점에 이르렀다. '서편제'는 안방의 텔레비전 시청자를 극장 관객으로 끌어낸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개봉 당시의 관객이 예전엔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던 관객이었으나 이후 이들 관객들은 극장으로 외출을 하기 시작했고 영화를 보는 성향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임 감독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지 않나 우려가 든다는 것이다. 관객이 변화하는 만큼 작품이 미처 쫓지 못한다면 그만큼의 간극으로 관객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 감독은 '서편제'의 관객이 기대하는 시점에서 좀 더 높게 멀리 비상해야 할 듯하다. 2007년 '천년학'이 개봉할 당시 관객은 이제 더 이상 '서편제'에 보냈던 순수하기만 한 감수성으로 영화보기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서편제'를 통해 이미 날갯짓을 배웠고 창공을 날 수 있는, 멀리 나는 새가 돼버렸다. '서편제'에 보였던 평단과 관객의 환호에 비해 '천년학'에 보여졌던 외면은 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 감독이란 시대의 흐름보다 늘 앞서가는 예술가다. 새롭고 창조적인 것을 모색하지 않는 순간 연출가는 그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평생 영화감독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하는 창조적 연출가의 소임에 관해 흐트러지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새로운 소재, 새로운 미장센, 새로운 영화적 요소, 새로운 표현방법, 새로운 주제의식 등 새로움과 창의성은 내 영화인생을 관통한 하나의 '화두'였다. 사실 내 화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진지하게 대중과 대화하고자 하는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으로 한국에서도 유명감독이 된 우위썬(吳宇森) 감독 역시 내 문하이기에 애틋하다.
우 감독은 홍콩 영화계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세계적인 흥행감독이 되었지만 최근에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속적으로 보일 수 있는 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 부족했다. 할리우드 진출 후 '미션 임파서블2'을 훌륭하게 완성하고 흥행에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윈드 토커' 같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우 감독은 홍콩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전쟁을 잘 모르는 세대임에도 세계 1ㆍ2차 대전을 겪으면서 가장 많은 전쟁영화를 촬영해 보고 흥행과 이데올로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낸 미국 감독들과 경쟁을 했으니 실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새로움이라는 화두와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 맞물려있는 경계선에서 관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감독이야말로 부끄럽지 않은 영화감독일 것이다.
난 내 문하를 거쳐 간 제자이자 동료이고 후배인 감독들에게 동병상련의 아픔뿐만 아니라 미흡한 것은 챙겨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초지일관하는 나의 신념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보자. 임권택은 이런저런 막일로 시작해 소품 담당을 거쳐 '비련의 섬'(1958)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조감독으로 기용되었다. 그 무렵 '용팔이' 시리즈로 유명한 설태호 감독도 영화계에 처음 입문해서 한솥밥을 먹는 조감독이 된다.
임권택 감독이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로 데뷔하면서 그 빈자리에 강대진 조감독이 들어온다. 강대진 감독은 이른바 3대 서민영화로 꼽히는 '박서방'(1960), '마부'(1961), '어부들'(1961) 등의 감독답게 서민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영화를 잘 만들었다. 그는 1961년 '마부'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특별 은곰상을 수상한다.
내 밑에서 연출공부를 하며 뼈가 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 감독 모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생각한다. 쪽 풀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 즉 스승보다 제자가 더 뛰어나거나 훌륭함을 이르는 말이라는데 바로 이런 모습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 청출어람한 훌륭한 제자들은 척박한 영화제작현실 속에서도 창조적인 작품을 위해 동시대를 앞서가고자 고심했던 내 노력의 한 과정이었다. 난 그 과정에서 철저한 연출수업을 주도했고, 이는 초창기 한국영화에선 전무후무 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꼼꼼하고도 완성도 높은 콘티를 통해 달성될 수 있었다. 청출어람한 훌륭한 감독들을 배출한 스승이라는 면에서는 지금도 남다른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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