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률(58) 전 국세청장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의혹을 해소시켜 주기보다는 오히려 의혹을 더 남긴 '꼬리 자르기' 수사였다는 곱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검찰은 특히 정권 실세와 연관돼 관심을 모았던 의혹들은 예외 없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을 내려, '면죄부 수사'를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야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은 "특검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어 이번 수사는 '종결'의 의미보다는 '미완'의 수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도곡동 땅' 문서 존재 여부
이른바 '도곡동 땅' 실소유주 논란은 현직 대통령과 연관된 부분이라는 점에서 이번 수사의 뜨거운 감자였다.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의 부인 홍혜경씨는 2009년 "남편이 2007년 대구국세청장으로 재직하면서 포스코 세무조사를 할 때 이명박 대통령이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전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2007년 BBK 수사 당시 "도곡동 땅은 이 대통령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정국의 뇌관으로 부상했던 이 문제는 2008년 특검 수사를 통해 "이 대통령과 연관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었다.
검찰은 15일 한 전 청장에 대한 수사결과 발표에서 도곡동 땅 의혹에 재차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안 전 국장과 함께 일했던 국세청 실무자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전표를 발견했다는 직원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은 또 2007년 실시된 포스코 세무조사 대상 기간이 2002~2006년이므로 1997년 작성됐을 도곡동 땅 문서는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며, 포스코 전표는 전산화돼 있어 수기로 표기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안 전 국장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국세청장 연임ㆍ유임 로비 의혹
한 전 청장은 2008년 12월 경북 경주시의 한 골프장에서 지역 기업인 및 국회의원 등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이어 이상득 의원과 가까운 인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한 전 청장이 국세청장 연임 로비를 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한 전 청장이 골프와 식사를 한 것은 확인했지만 청탁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검찰은 한 전 청장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유임을 위해 안 전 국장에게 "정권 실세에게 10억원을 줘야 하는데 그 중 3억원을 만들어오면 차장으로 승진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3억 요구설'도 근거없다고 결론 내렸다. 검찰은 두 사람이 2008년 초 호텔에서 만난 사실은 확인했지만 안 전 국장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고, 상급자가 부하에게 청탁을 하면서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는 것도 경험칙상 납득하기 힘들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은 안 전 국장의 "한 전 청장 유임을 부탁하기 위해 2008년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상득 의원을 만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국회 청사 출입 기록을 통해 방문 사실을 확인, 이 의원에 대한 조사 필요성이 생겼지만 서면조사만 한 채 수사를 끝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의원은 서면조사에서 "안씨를 만난 기억이 없다"고 밝혔고, 검찰은 이를 근거로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태광실업 표적 세무조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이어진 2008년 태광실업 표적 세무조사 의혹에 대해서도 검찰은 한 전 청장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하기 힘들다며 면죄부를 줬다. 국세청 규정에 교차세무조사 조항이 있어 서울지방국세청이 김해 소재 태광실업을 조사했다 해서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부산지방국세청이 먼저 요청해와 국장이 전결했고 한 전 청장은 보고만 받았다"고 밝혔다. 한 전 청장이 세무조사 내용을 청와대에 직접 보고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검찰은 "근거 없다"고 결론 내렸다. 한 전 청장의 운전기사와 청와대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1주일에 2회 이상 청와대를 출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기획출국ㆍ입국 의혹
한 전 청장은 2009년 3월 돌연 국세청장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가 각종 의혹에 대해 검찰 수사를 받을 경우 여권 실세들이 치명타를 입을 것을 우려해 정치권에서 도피성 출국을 종용했다는 것이 기획출국설의 골자였다. 한 전 청장은 연구와 집필 활동을 위해 출국했다고 밝혔지만 그의 미국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출국 2년 만인 지난 2월 한 전 청장이 갑자기 귀국하자 이번에는 기획입국설이 제기됐다. 귀국 시점이 '박연차 게이트'로 기소된 정치권 인사들에 대한 대법원 선고 직후였던데다, 'BBK 의혹'을 폭로했던 에리카 김씨와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것이 의혹에 불을 지핀 요인이었다.
검찰은 이에 대해 "연구 목적으로 미국에 갔던 한 전 청장이 스스로 판단해 귀국했으며 마지막 한 달은 남미 여행을 하면서 브라질 상파울루를 거쳐 들어왔다"며 기획출국 및 기획입국 의혹은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역시 한 전 청장의 진술에만 주로 의존해 내린 판단이어서 의혹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각종 개인비리 의혹
이날 수사결과 발표에는 S해운 및 A호텔 세무조사 관련 금품 수수, 직원 승진 청탁 뇌물 수수, 국제갤러리 세무조사 무마 대가 고가 그림 수수 의혹 등 한 전 청장 재직 시절의 개인비리 의혹은 포함되지 않았다. 검찰은 "소문만으로 수사할 수는 없다"고 밝혀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특히 주류업체인 D사가 주류수입면허를 재취득하는 과정에 한 전 청장이 개입했다는 의혹의 경우 검찰이 막판까지 수사 착수 여부를 저울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제기된 의혹에 대해 확인할 것은 했는데 수사를 진척시킬 만한 단서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업체 사람을 불러 조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윤갑근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는 "굉장히 무모하고 불필요한 행위"라며 "좀 더 근거있는 자료가 있어야 수사할 수 있다"고 일축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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