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만 해도 한국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은 66세에 불과했다. 55세에 퇴직을 하면 불과 10년 정도의 인생만이 주어진 셈. 그런데 불과 30년 만에 한국인의 수명이 80세를 돌파했다. 심지어 올해 만 40세인 성인 중 절반 정도는 94세 이상 살게 된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정년 퇴직 후에도 무려 35~40년 정도의 인생이 다시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의 은퇴에 대한 인식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 우리 사회의 은퇴준비는 왜 이토록 지지부진한 것일까.
첫째,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지나치게 자녀중심의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자신과 배우자의 인생보다는 자식의 교육과 결혼이 최고의 가치가 되다 보니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이 계속되고 결국 본인의 은퇴준비는 엄두를 낼 수 없게 됐다.
둘째, 지나칠 정도로 은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은퇴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녀에게 부양 받으며 죽음이나 기다리는 기간이라는 부정적 인식 때문에 은퇴 준비를 나중으로 미루기만 하고, 아예 언급조차 꺼린다. 그에 비해 선진국에서는 은퇴를 '제3의 인생(Third Age)'이라고 부르며, 사회에서 물러났다기보다는 또다른 인생을 시작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미국 제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현직에 있던 시절에는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퇴임 후 카터센터를 설립해 지구촌 분쟁해결을 맡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같은 왕성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제3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완등에 성공하고 이제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엄홍길씨가 주인공이다. 단순히 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는 사례들이다.
행복한 은퇴를 설계하려면 이처럼 은퇴에 대한 긍정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가족, 건강, 소득, 사회활동, 취미, 여가 등이 골고루 균형이 갖추어진 노후를 지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은퇴설계를 생활비 중심의 재무적인 것만 준비하면 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재무적 준비는 매우 중요하다. 단순 계산을 하더라도 부부가 월 200만원의 생활비를 30년 동안 사용한다면 7억2,000만원(200만원×12개월×30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남편보다 부인이 통상 3~4세 나이가 적고, 남성보다 여성이 6~7년 더 생존하고 있다. 결국 부인은 남편 사망 후 10년 정도를 혼자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부인 생활비를 부부 생활비의 80%로 계산하면 10년 동안의 부인 생활비로 1억9,200만원(200만원×80%×12개월×10년)이 더 필요하다. 이를 합치면 총 9억1,200만원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행복한 은퇴생활을 하려면 재무적 준비와 함께 비재무적 준비도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은퇴 후 생활비, 의료비, 주거계획을 준비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취미ㆍ봉사ㆍ종교활동, 건강 챙기기, 자기계발, 임종 등에 대해서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나이 들어서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 가족 특히 배우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취미활동을 하고 자기계발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할 것이며 무엇보다 이 사회와 계속 소통하고 함께 호흡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가족관계가 잘못 되어 있거나, 하루하루 인생을 사는 보람과 재미를 찾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한 노후생활이 될 수 없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공적인 노후라면 많은 돈을 준비해서 골프 치고 세계여행 다니는 모습을 가장 먼저 연상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사회와 깊숙하게 관계를 맺고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은퇴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다.
김윤환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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