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老부부가 맨손으로 50년…수선화 꽃대궐로 피었습니다
춘사월 거제로 꽃구경을 나갔다가 공곶이란 곳을 찾았습니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에 있는, 바다로 비죽 튀어나온 땅의 한 귀퉁이입니다. 거제의 화려한 봄이 그곳에 숨어있다고 해 찾아간 걸음입니다.
봄볕을 가득 안은 와현해수욕장을 지나 예구란 어촌마을에 차를 대고는 비포장 고갯길 하나를 넘었습니다. 질척이는 길을 걸어 천주교 공동묘지를 지나 드디어 공곶이 농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가파른 경사의 돌계단은 얼추 가늠해봐도 200m가 넘어 보입니다. 그 좁은 돌계단을 동백이 터널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진초록의 이파리와 짙붉은 꽃잎이 이룬 환상의 터널은 에 나올법한 신기한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 같았습니다.
돌계단 옆 급한 경사의 산자락엔 좁은 밭들이 다랑이논처럼 층층이 겹쳐져 있습니다. 샛노랗고 하얀 수선화가 밭을 메웠고, 눈이 내린듯한 설유화가 흰빛을 토해내고, 종려나무의 너른 잎이 부채처럼 초록을 펼쳐내고 있습니다. 층층 밭에 그려진 색의 조화에 눈이 멀 지경입니다.
조심조심 돌계단을 내려가 작은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 공곶이 농원을 일군 노부부를 그 집에서 만났습니다. 강명식(80), 지상악(76)씨 부부가 "누추한데 어찌 오셨냐"며 방석을 내주시더군요. 어찌 이런 곳에 터를 잡으셨냐 묻자 할아버지는 쑥스러워하며 "할마시한테 물어보소"라 하시데요. 안주인께선 "전 들어오고 싶지 않았어요. 바깥양반이 자연에 묻혀 살고 싶다고 해 같이 살았죠. 요즘 같아선 이혼감이지. 애들이 고생했어요. 학교 다니기 힘들어 육남매 모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외지로 유학을 나가야 했으니..."하시더군요.
바깥 어르신은 6ㆍ25전쟁이 난 직후 군에 갔다가 7년을 군 생활을 했답니다. 복무기간을 마쳤지만 제대 차례를 기다리는 데만 또 2년이 흘렀다는 군요. "마른명태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비쩍 말라 겨우 경남 진주의 고향으로 내려갔더니 모친이 내일 당장 거제로 가라 합디다. 거기 규수 한 명 보기로 약속했으니 동네 어르신과 다녀오라구요. 몸이 힘들어 안가겠다 했지만 어머니 소원이란 말씀에 '그래 이것도 운명인가 보다'하며 가기로 했죠."
하루를 꼬박 걸려 거제의 처가가 될 집에 찾아 들었고 등잔불 밝힌 어둑한 방안에서 그쪽 친지 다 모인 가운데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규수와 첫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후 한 달만에 거제에서 식을 올렸습니다. 아침 일찍 식을 치르고 난 뒤 오후에 처가쪽 친지의 권유로 산보를 나갔습니다. 그때 운명의 공곶이를 만나게 됩니다.
"너른 바다와 바로 앞의 섬 내도, 산자락이 어울리는 풍경을 보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 행복감이란. 부귀영화를 누린 그 어느 왕도 그런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진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살겠다, 결심을 했습니다.
처가에 좀 더 머물며 일거리를 찾다가 지금 부부가 사는 터에 먼저 살던 이웃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 담벼락에 피어난 빨간 글라디올러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꽃 씨앗 얻기를 청하자 집주인은 가을에 오라 했답니다. 가을에 다시 찾아가니 집주인이 글라디올러스 두 뿌리를 내주었습니다. 큰 뿌리 밑으로 콩알만한 알뿌리 30개가 달려있었답니다. "계산해보니 이 30개가 내년엔 900개가 되고, 후년엔 2만7,000개가 될 수 있겠더군요. 몇 년 있으면 그 뿌리를 팔아 이 땅을 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맘속으로 집주인은 두 뿌리를 주었지만 난 이걸로 이 땅을 다 얻어간다 생각했습니다."
글라디올러스 두 뿌리를 가꾸고 늘려가기 위해 마산의 고아원 마당을 빌리고, 진영의 공동묘지터를 빌려가며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 공곶이의 집주인이 서울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드디어 때가 됐구나 싶어 이제껏 공들여 키운 꽃을 다 팔아 집터와 농토를 샀습니다. 1968년 드디어 공곶이에 입성한 것이죠. 이후 돈이 생길 때마다 땅을 넓혀 지금의 4만평(13만㎡) 부지를 일구게 됐답니다.
그리고 일사천리 성공의 길을 달렸냐구요? 아닙니다. "공곶이에 들어왔을 때 정부가 소득증대 사업으로 감귤농사를 권했습니다. 감귤나무 심으면 비료도 지원하고 먹을 밀가루도 준다더군요. 감귤나무 한 그루면 자식 대학공부를 시킬 수 있다던 시절이었죠." 그는 공곶이 산비탈에 폭 1m, 깊이 1m로 4,000m 길이에 이르는 거대한 고랑을 팠습니다. 돌덩이와 큰 나무뿌리 가득한 비탈을 오로지 괭이 삽 도끼로 깎아 만든 밭입니다. 그렇게 감귤나무 2,000그루를 심었고 6,7년 지나 드디어 결실을 볼 때였습니다. 이웃들이 새부자 나온다고 모두 부러워했었답니다. 하지만 1976년에 지난 겨울보다 더한 추위가 거제에 몰려왔고 밀감나무 2,000그루는 모두 얼어 죽었습니다. "그때는 눈에 뵈는 게 없었죠. 머리카락이 다 하얗게 새버리더군요."
그래도 살아야겠다 다시 마음을 추스렸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한 것이 동백이었고 수선화였습求? 글라디올러스처럼 한 두 뿌리로 시작해 매년 그 수를 늘려갔지요.
"수선화는 10년이 될 때까지 별 수입이 안되더니 20년이 지나자 제법 찬거리를 사먹을 정도가 됩디다. 그리고 30년이 넘자 이젠 더 심을 땅이 없을 정도로 불어나 남는 뿌리는 고아원이나 경로당으로 보낼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렇게 공곶이와의 인연이 50년을 넘기며 할아버지의 허리는 활처럼 굽었고, 손바닥은 바윗돌만큼 단단해졌습니다.
공곶이 농원이 예쁘다 소문이 나며 찾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지금처럼 수선화가 만개할 때면 더 많은 이들이 찾아옵니다.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화장실도 마땅치 않고, 물이나 음료수를 구할 데도 없습니다. 그래도 공곶이 순례객의 발걸음은 끊이질 않습니다.
이곳을 찾을 때엔 꽃과 바다풍경을 조심스레 감상하고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갔으면 합니다. 혹 꽃을 캐가거나, 아무데나 용변을 본다거나, 돌담을 무너뜨리거나 하진 말아주세요.
공곶이는 자신의 운명을 믿고 50여 년 피와 땀을 쏟아가며 맨손으로 일궈낸 노부부의 낙원입니다. 그 낙원이 오래도록 아름다울 수 있게 우리가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거제=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여행수첩
거제의 4월, 섬 전체가 꽃밭이다. 가로수 상당수가 동백 아니면 벚나무다. 새빨간 동백꽃이 나뭇가지와 길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하얀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펼쳐진다. 거제의 벚꽃터널은 학동고개에서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거제의 대금산(437m)은 진달래로 산 전체가 붉게 달아올랐다. 산 정상이 더욱 짙다. 붉은 진달래군락과 바다를 함께 감상할 수 있어 좋다.
해금강 가는 길의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 주변엔 유채꽃이 아름답다. 노란 유채꽃과 쪽빛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이뤄낸다. 지중해풍의 호텔인 블루마우리조트의 너른 앞마당이 샛노란 유채꽃으로 뒤덮인다.
대금산 아래 외포는 남해의 미조항, 부산 기장의 대변항과 함께 멸치 항구로 유명한 곳이다. 이제 막 봄멸(봄멸치)철이 시작됐다. 작은 몸집에 남해 바다의 싱싱한 봄기운을 가득 담고 있어 집채 만한 고래가 부럽지 않다. 외포의 여러 횟집에서 싱싱한 멸치회를 내놓는다. 멸치회는 미나리와 양배추, 깻잎, 당근, 상추 등을 넣고 매콤한 초고추장에 무쳐 먹는 맛이 일품이다. 외포 양지바위식당이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맛집이다. 멸치를 방풍, 원추리, 머위, 두릅, 세발나물 등 봄나물에 싸 먹는 게 특징이다. 봄나물과 봄멸의 궁합이 환상이다. (055)635-4327
해금강 바람의 언덕 주변에는 바지락죽으로 최근 유명해진 명인 바지락죽 집이 있다. 쌀, 녹두, 바지락, 표고, 당근, 인삼을 갈아 넣고 수삼을 고명으로 얹은 바지락죽이 1만원. 맛은 물론 영양 면에서도 합격점이다. 전날 싱싱한 횟감에 거나하게 술을 들었다면 아침 해장메뉴로 딱이다. 죽에 따라 나오는 정갈한 밑반찬도 인상적이다. 사과 발효식초를 사용해 빨갛게 무쳐낸 바지락 무침도 식욕을 당긴다. (055)632-7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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