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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4> 시나리오 작가들의 작업실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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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4> 시나리오 작가들의 작업실 '카페'

입력
2011.04.13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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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기운이 넘쳐났다. 젊은 여가수의 흥겨운 목소리에선 여유로움도 묻어났다. 7일 오후 찾아간 서울 화양동의 한 카페 2층. 8개 남짓한 테이블에선 인근 대학의 학생들이 커피 향과 함께 수다를 즐겼다. 학업이나 업무와는 별반 상관 없는 분위기다. 그런데 한쪽에서 이문우(가명ㆍ38)씨는 노트북으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은 한 영화 관련 기관이 주최하는 장편영화 제작 공모전에 제출할 시나리오 작성. 마감(8일)을 하루 앞둔 그의 초조함과 긴장이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역력히 배어 있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웃고 떠드는 유희의 한복판에서 그는 치열한 삶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가 카페에 가는 이유

영화감독 지망생인 이씨는 매일 오전 카페로 출근한다. 2007년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일상이 됐다. 장편영화 메가폰을 쥐어 보기 위해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써 왔다. 장소는 일정치 않았다. 마음에 드는 카페라면 종로든 압구정동이든 위치를 가리지 않았다.

공모전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지난해 12월부터 근무 시간은 늘었다. 오전 10시께 출근해 밤 10시께 퇴근했다. 일거리가 많은 날이면 새벽 1,2시께 집에 들어갔다. 오후 5시30분께 어린이집에 있는 두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는 잠깐의 시간을 빼곤 카페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냈다.

“조용하고 답답한 도서관”에 비해 카페는 많은 장점을 지녔다. 넓은 흡연실을 이용할 수 있고, 샌드위치 등으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젊은 손님들 사이에서 오가는 기가 막힌 대화들을 듣고 메모할 수 있는 것”도 시나리오 작성에 쏠쏠한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집에선 가질 수 없는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느낌을 주는 점”이다.

업무를 처리하는 장소이기에 좋은 카페를 찾는 기준도 일반인과 다르다. 콘센트가 있어야 하고, 인터넷은 잘 터져야 한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아도 안 되고 공간이 좁아서도 안 된다. 이런 곳에 오랜 시간 앉아 있으면 종업원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장시간 앉아서 일해야 하니 의자가 자기 몸에 맞아야 하고, 쿠션의 탄력도 뛰어나야 한다.

“어떤 영화인은 카페에서 영화편집도 한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 한 카페에 갔더니 어느 감독과 배우들이 시나리오 읽기를 하고 있더라.”

이씨는 기분 전환을 위해 하루에 카페 2,3곳을 돈다. 요즘 단골로 다니는 카페는10곳. 커피 값도 만만치 않다. 싼 커피를 주로 마신다지만 한 달 커피 값만 20만원 정도다. 그러나 이씨는 20만원을 들여 자기만의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씨는 “그래도 나는 형편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가끔은 집에서 버틸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아직은 카페에 나와서 돈 쓰며 일할 수 있지 않나. 카페에서 파는 음식이 이제 물려서 못 먹을 지경이 됐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 입장에선 사치다.”

그들이 즐겨 찾는 카페

카페를 찾는 영화인은 이씨만이 아니다. 많은 영화인들이 카페를 사무실 삼아 영화 작업을 해 나간다. ‘그림자 살인사건’의 박대민 감독은 매일 오전 집 인근의 한 카페로 간다. 이어 그는 자신이 도착했음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트위터의 위치정보 공개 서비스를 통해 지인들에게 알린다. 일종의 출근 도장을 찍는 셈이다.

시나리오작가 등 영화인들이 카페를 즐겨 찾다 보니 그들만의 아지트도 생겨났다. 2, 3년 전까지 각광받은 곳은 서울 관철동의 T카페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맛있는 커피와 한 층 전체를 차지한 흡연실, 여러 간식거리가 영화인들을 매혹시켰다. 한때 예술영화의 중심 역할을 했던 극장 시네코아가 지척에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양익준 감독을 독립영화계 스타로 만든 ‘똥파리’도 이 카페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최근 시설을 대대적으로 바꾸면서 하나둘 영화인들이 이 카페를 떠났다. 단순했던 커피 메뉴도 다양한 고급 커피들로 대체됐다. 시네코아가 극장 간판을 내린 것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8일 오후 이 카페에서 만난 시나리오작가 문이영(가명ㆍ34)씨는 “오래 전부터 다니다 보니 습관적으로 찾게 된다. 예전엔 낯익은 얼굴도 많이 마주쳤지만 요즘은 아는 사람 만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최근 시나리오작가들 사이에서 ‘일할만하다’고 소문난 곳은 압구정동의 T카페다. “그곳에선 남의 영화를 두고 함부로 험담하지 말라”는 말이 영화인 사이에 떠돌 정도로 시나리오작가들이 애호하는 장소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시나리오작가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인근에 영화사들이 많아 여러 가지 업무 모임에 즉각 응할 수 있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학동의 C카페도 요즘 떠오르고 있는 장소다. 11일 오후 이곳에서 만난 시나리오작가 김은형(가명ㆍ35) 소영희(가명ㆍ35)씨도 이 카페를 작업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정도 공간?이렇게 쾌적한 작업실을 요즘 어디서 구할 수 있겠나. 커피를 내가 타지 않아도 되고 음악도 알아서 틀어 준다. 한산한 곳만 찾아다니는데 그러다 보니 잘 가던 카페 세 곳은 워낙 장사가 안돼 문을 닫기도 했다”(김은형). “주문과 계산을 한 뒤 종업원과 눈을 마주칠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카페 2층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이 너무 없어도 안 좋다. 옆 사람 이야기를 받아 적을 수 있는 정도의 활기는 있어야 한다”(소영희).

그들이 정말 카페에 가는 이유

단지 업무의 효율성만이 시나리오작가들을 카페로 이끄는 것일까. 그들에게 카페는 대안 공간 일뿐이었다.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한 충무로의 어두운 현실이 그들을 카페로 내몰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 충무로가 호시절을 구가할 때 재능 있는 시나리오 작가들은 영화사로부터 작업 공간을 제공받는 게 관행이었다. 주방과 욕실 등 생활 시설을 다 갖춘 원룸이나 오피스텔 제공이 시나리오 계약의 전제 조건이었다. 김씨는 “원룸 대신 장소를 이동하며 자유롭게 시나리오를 쓰고 싶을 땐 별도로 든 비용 처리를 요구하면 들어 주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한때 국내 최고 영화 제작사로 군림했던 S사는 충무로 사옥 8개 층을 시나리오작가들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꾸미고 많은 영화를 생산해 내기도 했다. 시나리오작가들이 어느 정도 대우 받던 시절이었다. 소씨는 “노래방처럼 넓은 공간을 작가가 한 명씩 차지하고 있었다. 막 입주한 작가들은 위층을, 영화화가 진행 중인 작가는 아래층을 사용했었다”고 당시를 되돌아봤다.

하지만 충무로의 대형 투자 배급사들이 경영 합리화를 이유로 돈줄을 죄면서 시나리오작가들의 작업 환경도 급속도로 나빠졌다. 작업 공간 제공은커녕 시나리오에 지급하는 돈도 극히 인색해졌다.

“안정적인 작업실이 있으면 밤도 샐 수 있고, 옷도 편하게 입고 일할 수 있다. 확실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화사들도 운영비가 없어 사무실을 정리하는 분위기니 우리라고 별 수 있겠나”(소영희).

김씨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회사원들도 사무 공간을 제공받고 급여는 따로 받지 않나. 그러나 이런 기본 비용조차 주지 않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이야기하면 왜 이리 카페를 돌며 노트북을 펴놓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여러 카페를 돌며 일하는 김씨와 소씨는 각각 10장 내외의 커피쿠폰을 지니고 있었다. 충무로에서 살아남기 위한 시나리오작가들의 뜨거운 투쟁의 증표로 비쳤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 냉대받는 국내 시나리오

“시나리오는 영화의 씨앗이다. 1급 시나리오에서 1급, 2급, 3급 영화가 나올 수 있지만 3급 시나리오에선 3급 영화만 나온다.” 일본이 배출한 세계적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ㆍ1910~98)의 말이다.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장의 발언과 달리 충무로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우는 해가 갈수록 야박해지고 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방송작가로 전업하는 시나리오작가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연구 보고서 ‘한국 영화 기획 개발 경쟁력 강화 방안 연구’에 따르면 2007년 한국 영화의 평균 기획 진행비는 2,200만원으로 2006년(4,700만원)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006년 1.71%에서 2007년 (0.87%) 1% 포인트 가까이 축소됐다. 기획 진행비에는 시나리오작가들이 시나리오를 안정적으로 쓸 수 있도록 제공되는 공간 임대료, 식대 등이 포함돼 있다. 영화계 살림이 2007년보다 나빠졌음을 감안하면 시나리오작가들의 작업 환경은 더욱 나빠졌다 할 수 있다.

까다로워진 계약 조건도 시나리오작가들이 꼽는 애로점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 영화사들은 최종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작가와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는다. 작가 입장에선 자칫 헛심만 쓰고 돈은 손에 쥐지 못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는 것. 시나리오작가 김은형(가명)씨는 “계약을 해도 투자를 받은 뒤에야 돈을 준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처우가 열악해지면서 시나리오작가들의 충무로 이탈 현상이 가중되고 있다. 감독 위주의 제작 관행과 달리 작가들의 고유 영역이 확고한 방송의 특징도 이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이리스’와 ‘아테나’ 등 영화 스태프들을 적극 활용한 대형 드라마의 잇따른 등장 역시 시나리오작가의 여의도행을 부추기고 있다. 종합편성채널의 등장에 따른 방송작가 수요의 증가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한 영화인은 “방송과 영화의 영역 파괴도 이들의 이직을 자극하고 있지만 충무로의 대우에 실망해 떠나는 작가들이 많다”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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