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4ㆍ19에서 열린다. 4ㆍ19는 새삼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이 그 한 달 남짓 전의 3ㆍ15 부정선거에서 비롯된다.
부정 선거 결과는 투표율 94.3%에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이었다. 당일 마산에서는 야당 주도로 규탄 시위가 터져 시위대가 경찰서 등을 습격해 800여명의 사상자를 낸다. 4월 11일에는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오르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18일에는 서울의 고려대 학생들이 종로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다 임화수 등이 동원한 정치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해 4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이튿날 19일 서울 시내 학생 2만여명이 떨쳐 일어나는 큰 시위로 이어지는데, 경찰의 발포로 142명이 숨지는 '피의 화요일'로 얼룩졌다. 이렇게 온 나라가 서슬 푸른 고빗길을 오르던 그 때에 우리 문화 예술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 무렵 우리 문화 예술인들의 움직임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정경 하나를 소개해 보면 이렇다. 3ㆍ15 열흘 전인 3월 6일 서울운동장(이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뀐다)에서는 '이승만 박사, 이기붕 선생 출마환영 예술인대회'라는 것이 열렸다. 1961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이정재,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 주도로 열린 이 대회에서 문화 예술인이라는 사람들은 잔뜩 겁 먹은 얼굴들로 하나같이 머리띠를 두른 채 "이승만, 이승만""이기붕, 이기붕" 하며 누군가의 선창을 따라 소리소리 질러대고 있었다면 곧이 들리는가. 백주 대낮에 다른 곳도 아닌 서울운동장 한 가운데서 버젓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로서 과연 믿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 때는 그 운동장의 사방 둘레도 툭 터져 있어 버스나 지상전차를 타고 지나가던 시민들도 차창 바깥으로 그 정경을 속속들이 내다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김승호다" 혹은 "허장강이다" 하며 대회의 속 알맹이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오불관언한 채 오직 저 유명한 배우들 실물을 보는 것으로만 요행으로 알고 탄성들을 내질렀던 것이다.
원 저럴 수가 있었을까, 어쩌다가 우리네 문화 예술인들이 저 지경으로까지 떨어질 수가 있었을까 하고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1960년 3월 그 때의 정황은 우리 태반의 문화 예술인들에게는 그런 세월이었고 버스나 지상전차 속의 일반시민 수준도 대강 저러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그 대회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바로 그 점이 여간만 요행스러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때 내가 그 기괴한 예술인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 무슨 나대로의 민주적 신념에 따른 것이었을까. 결코 아니었다. 단지, 몰랐던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 연락해 오지도 않았다. 나도 이튿날의 신문을 보고서야 뒤늦게 그런 해괴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신문기사를 읽으며 혼자 배시시 쓴 웃음을 한번 웃고는 그냥 무덤덤하게 일과성(一過性)으로 넘겼을 뿐, 추호나마 울분 같은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특별히 해괴해 보인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설령 문학인들 중에 그 대회에 몇몇이 끼어 있었던들, 지금은 거개가 고인이 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 일로 그이들이 그 뒤 50년 세월을 노상 전전긍긍하며 숨어서 살아야 했을까. 나는 2011년을 사는 지금에 있어서도 꼭 그렇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때 그 자리에 끼었던 사람이 불과 몇 년 뒤 자기가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낯 가죽 두텁게 잘 난 척 하고 나서는 것은 보기에 민망할 것이지만, 그런 일로 하여 평생을 두고 기가 죽어 지내게 해서도 안 된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자유세계를 표방하는 이 대한민국 사회의 넓고도 따뜻한 '품'이기도 할 것이다. 이 점은 그 때 '만송족(晩松族ㆍ이승만 말기의 어용 지식인)'이라고 지칭되던 일부 문학인들의 그 뒤 행태가 여실하게 입증해 주기도 한다.
한데 사실을 말하면, 그 문화 예술인대회에 당시의 중요 문학인들이 참가하지 않고 우물쭈물 유야무야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 행사의 주도 인물이었던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가 저들 눈치껏 눈 감아준 덕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아무리 무지막지한 저들이었지만 저들도 저들 눈치만큼 우리 문학인들만은 영화인이나 연예인들 보다는 한 급 높게 대접해 주었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정부수립 초창기 경무대 공보비서였던 이산 김광섭 시인이나 공보처 차관이었던 소천 이헌구, 그리고 그 전에 유엔 외교무대에 나섰던 여류시인 모윤숙 등의 유형무형의 콧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라. 만에 하나, 그 자리에 염상섭이나 박종화 김동리 황순원에 시인 서정주나 유치환 조지훈, 그 밖에도 모모하다는 시인 소설가들이 끼어 있었다면 우리 문화계는 둘째 치고 그 뒤의 우리 사회가 어떤 꼬락서니로 뻗어 갔을 것인가.
바로 권력과의 관계에서 이런 종류의 일정한 거리, 틈서리, 여유, 양식(良識)이야말로 이 남한 문화계가 북한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경무대의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와 함께 권력 핵심부의 시녀였던 정치깡패 이정재나 임화수까지도 적어도 그 정도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 경우는 유연성이었다기 보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정치적 감각이었을 터이다. 지나온 시절을 곰곰 돌아보면, 이 나라 정치며 경제며 사회며 문화가 더듬어 온 길은 통째로 아슬아슬 했을 정도로 노상 위국 속을 헤쳐 왔지만 그 전체 국면은 명실공히 요행, 요행이었음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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