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늦은 마을이 있다. 지난해 늦봄부터 살고 있는 경기 용인 동백의 어은목 마을이 그런 곳이다. 주말에 한참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산비탈로 쑥을 뜯으러 갔다가 적잖이 놀랐다. 쑥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한참을 뜯어도 작은 바구니를 채우기 어려웠다. 보름 뒤에 다시 와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아침마다 날씨를 검색해 보면 서울보다 최저기온이 6도는 낮아 설마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매화와 산수유가 겨우 피기 시작했고, 기다리다 지친 개나리도 함께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있으니, 철 모르는 꽃들끼리 한꺼번에 필 모양이다.
■ 시골 사는 재미를 맛보려고, 지난해 서울 합정동 골목을 지나다가 유난히 예쁜 빛에 이끌려 무단 채취한 나팔꽃 씨를 울타리 아래 한 줄로 뿌렸다. 야채 재배용 플라스틱 대형 화분에 상추씨를 뿌리고, 고추 모종 네 포기를 심었다. 구석진 곳에는 호박 모종 두 포기도 심었다. 상추를 파종한 면적은 다해야 1㎡ 정도지만 일단 싹이 나서 자라기 시작하면 우선은 솎아내느라, 나중에는 웃자란 잎을 따느라 바쁘리라. 네 포기의 고추 모종도 잘만 자라면 수백 개의 풋고추를 생산할 수 있다. 호박 넝쿨을 상상하면 즐거움이 부쩍 커진다.
■ 돈만으로 치면 불합리한 행동이다. 화분을 사는 데만 2만원 넘게 들었고, 부엽토와 씨앗, 모종을 사느라 다시 3만원 이상이 들었다. 언제 또 이사를 가게 될지 몰라 두고두고 쓸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올해만으로 따지자면 노동력 기회비용을 빼더라도 결코 득이 아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갓 따온 풋고추와 상추를 곁들인 밥상에서 느낄 만족감을 생각하면 얘기가 다르다. 더러 물을 주고, 풀을 뽑는 간단한 노동력의 투입도 정서적으로는 비용이 아니라 소득이다. 어차피 비워둔 땅이니 공간의 기회비용은 따질 것도 없다.
■ 도회지일수록 노는 땅이 드물다. 대개 농촌에 뿌리를 두었을 나이 든 세대는 산기슭이건, 주택가 공터건 가리지 않고 한 뼘의 땅만 있으면 바로 밭을 일군다. 최근에는 건강과 식품 안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아파트 베란다나 양옥집 옥상을 활용한 채소 재배도 크게 늘었다. 도심 대기에 담긴 타이어 먼지 등 오염물질을 생각하면 과연 얼마나 깨끗한 채소를 키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신선도만큼은 발군이다.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건강한 삶의 의지를 다지는 것만도 지치고 무기력해지기 쉬운 현대인에게는 보약과 같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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