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긴 전통의 사슬
1980년대 중반 미국 주간 뉴스위크에 '29대 할아버지가 같다는 이유로 결혼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동성동본 금혼에 관한 보도였지요.
40대 중반인 저는 나이에 비해 겪은 일이 좀 많습니다. 동성동본 결혼과 관련해서도 참으로 희소한 케이스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부부는 동성동본입니다. 특히 남편 집안인 경상도 종가가 이들의 혼인을 몹시 반대했었지요. 하지만 뱃속에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것을 허락 받았습니다. 동성동본 금혼법으로 인해 부부는 몇 년 동안 마음고생을 하다가 70년대 후반 한시적으로 결혼을 허용할 때 구제 받았습니다.
그 때 부부를 이어준 태중의 아기는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어느덧 30대가 돼 결혼을 하게 됐지요. 사귀는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하필이면 또 동성동본이지 뭡니까. 동성동본 금혼조항이 폐지되면서 본은 같아도 파가 다른 아들 커플은 다행히 부부로 맺어질 수 있었습니다.
부부는 자식도 부모와 같은 아픔을 겪을까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이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성씨인 것은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중매를 하다 보면 원하는 이성상만큼 기피 조건에 대해서도 많이 듣게 됩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성격, 경제력, 직업, 학벌 등에 대한 선호와 기피 조건은 많기만 합니다. 아울러 절대 빼놓지 않는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동성동본은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법도 허락한 사랑
동성동본 결혼을 금기시하는 오랜 전통 탓일까요, 위헌 판결을 받고 법이 없어졌음에도 젊은이들 사이에는 동성동본과의 만남을 기피하는 경향이 남아있습니다. 동성동본 결혼에 관한 현장의 목소리들을 전해볼까요?
"프로필을 검색하는데, 본관이 안 나온다. 동성동본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확인하나",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어른들이 계셔 무시할 수 없다", "소개 상대가 동성동본이라면 아무리 조건이 좋더라도 안 만난다", "남들 안 좋아하는 것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아직도 동성동본은 거의 모든 집안에서 금기하는 사항 아닌가"….
21세기 첨단 세상에서도 동성동본은 이토록 위력을 발휘하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남의 일이라면 "안 될 게 뭐 있겠는가"라고 대범한 척 넘기면서도, 정작 자신이 동성동본을 만나는 것에는 정색을 하고 꺼리는 이중적 잣대가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나마 서울에서는 상당히 완화된 편입니다. 그러나 지방으로 갈수록, 가족관계가 좋을수록 동성동본 기피 현상은 더욱 심해집니다. 급속도로 변하는 사회와 달리 결혼관은 옛날 그대로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동성동본 결혼이 좋다, 나쁘다를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동본 따지자면 김해 김씨는 선택권이 굉장히 좁아지네요"라는 어느 회원의 지적대로 그 옛날의 가치관이 현실을 지배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반문하고 싶을 뿐입니다.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시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부모 세대는 법의 장벽에 가로막힌 채 사랑에 우는 시대를 살았지만, 자녀들은 한결 자유롭게 이성을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랑부터 하십시오. 본부터 따지지 마시고요.
■ 남녀본색
통계청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성씨는 286개(2003년 기준)다. 이 가운데 김씨, 이씨, 박씨, 최씨, 정씨를 5대 성씨로 본다.
결혼정보회사 선우 부설 한국결혼문화연구소는 전체회원 12만819명(남 5만9294·여 6만1525명)을 대상으로 성씨 비율을 파악했다. 조사 결과, 김씨가 전체의 20.9%로 가장 많았고 이어 이씨 15.1%, 박씨 8.4%, 정씨 4.9%, 최씨 4.8% 순으로 나타났다.
이씨 회원 중 본관 정보를 기재한 1만1651명의 비율을 조사했더니 전주 이씨가 대상자의 35.1%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경주, 성주, 연안 등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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