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education is a journey, not a race.’(교육이 경주가 아니라 긴 여정(旅程) 같은 곳.)
최근 카이스트 학생들의 잇단 자살 사건을 접하면서, 몇 년 전 영국에 있을 때 동네 고교 정문에서 본 글귀를 떠올렸다. 산책할 때 이 학교 앞을 자주 지나곤 했는데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짧은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살벌한 경쟁의 소용돌이에 내몰린 한국 학생들에게 이런 교육철학을 실천하는 학교가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여행을 하면서 남보다 앞서려고 뛰는 사람은 없다. 교육이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을 두루 살피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학교는 경마장이 아니라 삶의 지혜와 도리를 깨달아가는 여행지가 되어야 한다.
말들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 딴판이다. 경쟁을 부추기고 야멸차게 채찍질을 해댄다. 지구상에서 우리처럼, 우리 학교들처럼 긴장과 불안과 압박에 짓눌려 살아가는 곳이 또 있을까.
자살률 세계 1위의 오명(汚名)도 이제 대수롭지 않을 만큼 우리사회는 대담해졌다. 해마다 자살하는 대학생이 지난 10년간 평균 230명꼴이고,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중고생이 146명이나 된다(교육과학기술부 자료). 카이스트 학생들의 잇단 자살이 문제를 첨예하게 보여주기는 하나, 이것이 결코 카이스트만의 문제가 아님을 말해준다.
경쟁이 없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적 성공에 이처럼 치열한 경쟁이 원동력이 됐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경제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또는 소수의 승자에게만 행복을 보장한다면, 다수가 그런 경쟁에 동의할 수는 없다.
문제는 경쟁만 있고, 배려와 보살핌이 없다는 것이다. 학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만 관심을 쏟을 뿐, 못하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북돋우지 않는다. 한국교육개발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2009년 평가결과를 분석한 결과, 읽기능력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한 한국 학생은 9년 전보다 7.2% 늘어 증가율이 비교 대상 국가들 가운데 1위였으나, 최하위권 학생의 비율은 9년 전 그대로여서 감소율이 비교 대상 국가들 가운데 최하위였다(한겨레 11일자).
이런 학교들에서 ‘빛나는’ 학생부는 SKY 대학(서울대ㆍ연세대ㆍ고려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위한 선물이 되고(한국일보 3월31일자 ‘불신 키우는 학생 평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그 속에서 숨 죽이고 살아야 한다. 고교시절까지만 해도 그 경쟁사슬의 정점을 차지했던 상당수 카이스트 학생들이 대학에 와서 겪은 좌절감이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몰아치는 채찍질에 한숨조차 돌릴 수 없었던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해법은 샛길과 퇴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죽기살기로 경쟁하고, 한번 지면 끝장인 사회에선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하게 만들어지고, 승부에서 져도 살아갈 방도가 제시돼야 한다.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미국에서 공부한 경험을 내세우며 학생과 교수들을 몰아 부쳤다. 승자의 시각만 있을 뿐, 패자의 관점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세상에 누구도 압박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지만, 때론 거기서 벗어나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 누구나 경주마처럼 대학 4년 내내 숨을 헐떡이면서 살 수는 없다.
김상철 정책사회부장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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