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와 시얼샤 로넌. 첩보 스릴러 ‘한나’의 문을 여는 키워드다.
우선 라이트. 2005년 동명 고전소설을 필름에 옮긴 데뷔작 ‘오만과 편견’으로 갈채를 받은 영국의 신예 감독이다.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과 한 소녀의 회한을 다룬 ‘어톤먼트’(2007)로 영국 아카데미영화상 작품상을 받으며 영국 영화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물론 그는 노숙하는 천재 첼리스트와 신문 기자의 우정을 그려낸 ‘솔로이스트’로 엇갈린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작이든, 실패작이든 그의 영화 이력은 액션 첩보 스릴러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도 참 멀어 보인다.
다음은 로넌. 아홉 살에 데뷔해 ‘어톤먼트’와 ‘러블리 본즈’(2009)로 명성을 얻었다. 화약 냄새나 피비린내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열일곱 살 소녀 스타다.
‘한나’는 첩보 스릴러라는 장르와는 도저히 섞이지 못할 듯한 두 사람의 재능이 기이하게도 빛을 발하는 영화다. 서정적 감성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 소녀의 순수함과 인간 병기의 냉혹함이 극명하게 맞서며 묘한 조화를 이룬다. 첩보 스릴러의 장르적 관습을 깨며 관객에게 색다른 쾌감을 던지는 참신함이 돋보인다.
영화의 서두는 눈으로 뒤덮인 핀란드 오지.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인 아버지 에릭(에릭 바나 분)과 열여섯 살 딸 한나(로넌 분)가 원시인처럼 숨어 살면서 첩보 훈련에 몰두하는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나가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위해 집을 나서고, 두 부녀의 행방을 좇던 CIA 간부 마리사(케이트 블란쳇 분)가 마각을 드러내면서 서스펜스는 급 물살을 탄다.
영화엔 눈길을 잡는 장면이 많다. 한나의 모험이 이어지는 핀란드 모로코 스페인 독일의 풍광이 아름답다. 그림엽서를 옮겨 놓은 듯한 이들 장면은 글로만 세상을 배웠다가 뒤늦게 실제 세상을 알아 가는 한나의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심리를 반영한다. 한나의 거침없는 액션도 단연 눈요깃거리. 그러나 에릭이 자신을 미행해 온 첩보원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버스터미널부터 지하보도로 몇 분 동안 쭉 이어지는 오래찍기(롱테이크) 장면은 영화 학도라면 몇 번이고 복기해 볼 만한 명장면이다. 키스를 단지 “안면근육 36개를 이용한 행동”으로 알던 한나가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익혀 가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그러나 110분의 상영 시간이 버겁게 느껴지는 단출한 이야기가 약점. 한나의 출생 비밀을 반전으로 지니고 있지만 뒷심이 부족하다. 1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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