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파이 지음ㆍ백선희 옮김
21세기북스 발행ㆍ128쪽ㆍ9,000원
혼자 점심을 먹고, 퇴근 후에는 곧장 집에 들어가고, 찾아오는 친척이나 손님은 거의 없는 50대 독신남. “세상 일에 크게 실망”해 스스로 문을 닫은 이 남자가 어느 날 냉장고 문을 열다 소름 끼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냉장고 속 주스가 조금씩 사라져 있는 것. ‘누군가 마셨다. 그런데 난 혼자 산다.’
일상의 틈새로 들어온 이 불안감에서 시작되는 는 단단한 아지트에 숨어 있던 한 남자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기묘한 사건을 다룬다. 프랑스 작가 에릭 파이(48ㆍ사진)가 일본에서 실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로 프랑스에서 콩쿠르상과 함께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프랑세즈소설대상을 지난해 수상했다.
소설의 밑감이 된 실화는 2008년 5월 일본의 여러 신문에 실린 사건. ‘음식물이 사라지는 것을 알아 챈 50대 독신남은 집에 카메라를 설치, 낯선 여인이 집안을 거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알렸다. 경찰은 이 집의 한 벽장에서 50대 여인을 체포했는데 벽장에는 돗자리와 옷가지도 있었다. 살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는 여인은 그 집에 1년 가까이 숨어 지냈던 것으로 조사됐다.’ 건조한 사회면 스트레이트 문장만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혼자 살고 있다고 여긴 남자는 기실 낯선 여인과 동거해 왔던 것이다.
로이터통신 기자로 취재차 일본에 머물렀던 작가는 이 사건의 뼈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두 사람의 내면과 숨은 사연을 재창조한다. 소설 속 독신남 시무라 고보는 벽장에 숨은 여인처럼 외톨이로 제집에만 침잠해 있는, 이를테면 ‘사회의 벽장’에 갇힌 이. 시무라는 여인의 침입을 통해 “어떤 야심도, 어떤 희망도 돋아나지 않은” 삭막하고 초라한 제 삶을 돌아보며 몸서리친다. 여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벽장 안에 몸을 누이며 그녀의 체취를 찾는다. 소설 후반부에 드러나는 것은 여인의 사연이다. 사고로 일찍 부모를 잃고 세상에 대한 증오로 젊은 시절을 보낸 여인이 마침내 갈 곳을 잃고 시무라의 집을 찾아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소설은 그러니까 세상의 벽장에 갇힌 외로운 남녀의 비켜간 동거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한 셈이다. 두 사람은 법정에서 딱 한 번 대면할 뿐이지만 그들의 뿌리는 저 어디 땅 밑에서 이어져 있다. 무대가 된 나가사키(長崎)는 히로시마(廣島)에 이어 원자폭탄이 두 번째로 떨어진 도시. 두 남녀를 벽장으로 몰았던 바깥 세계가 폐허라는 암시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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