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훈(지성)이 인숙(염정아)에게 세계일주 항공권을 건네며 "지구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도망가자. 난 김여사가 가자면 언제든 오케이"라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데 그 장소가 누구든 볼 수 있는 정원이다. 묘한 삼각관계였던 현진(차예련)이 우연히, 아니 당연히 이 장면을 본다. 현진은 인숙이 사무실에서 윤서(전미선)와 손잡고 어머니 공순호(김영애) 회장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꾸미는 것도 우연히 엿듣는다.(MBC '로열패밀리')
# 진철(송승환)과 병원 계단에서 말다툼을 하던 신애(강문영)는 "내가 당신의 아들을 낳았다"며 소리를 지른다. 마침 지나던 진철의 아내 현숙(이혜영)이 이를 듣고 진철의 정체를 알게 된다. 앞서 진철은 부리는 사람들이 상주하는 집에서 장인과 큰 소리로 다투다 결국 살해하는데, 문밖에서 신애가 이를 모두 엿듣는다.(MBC '내 마음이 들리니')
드라마마다 엿듣기가 횡행하고 있다. KBS 일일연속극 '웃어라 동해야'뿐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악녀 새와(박정아)의 엿듣기 시리즈로 극의 줄기를 끌고 와 '새와는 소머즈 귀' 등 비아냥을 들었다. 하지만 막장이란 비판이 무색하게 시청률은 40%를 웃돌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엿듣기는 이제 한국 드라마의 감초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막장 드라마는 차치하고 비교적 호평 받는 드라마들도 예외가 아니다. 재벌가를 무대로 한 여인의 미스터리 한 삶을 그리는 '로열패밀리'에서 현진의 엿듣기 행각은 '웃어라...'의 새와에 이은 '제2의 소머즈'로 불릴 만하다. 현진은 인숙이 사무실 안에서 나누는 대화도 엿들어 '무슨 사장실 문이 종잇장이냐'는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다.
사실 엿듣기 코드는 오래된 드라마 기법 중 하나다. 그러나 예전에는 극의 반전을 꾀할 때나 한 두 번 쓰였다면, 요즘엔 아예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된 장치로 남발된다. 그 내용도 문제다. 엿듣기의 묘미는 숨겨진 비밀을 조금씩 알아간다는데 있는데, 요즘 드라마에선 툭 트인 공간에서 다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엄청난 비밀을 떠들어대는 걸 우연히 지나다가 듣는 식이어서 엿듣기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주인공들이 신공에 가까운 엿듣기 능력을 보인 SBS '아내의 유혹' 이후 본격화했다는 지적이다. 드라마 작가 A씨는 "이 드라마가 성공하면서 엿듣기 같은 수법을 동원해 쉽게 풀어가도 재미만 있으면 시청률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퍼졌다"고 말했다.
드라마 작가 B씨는 "감정선을 폭발시킬 수 있는 장치로 엿듣기 만한 게 없기 때문에 폐해를 알면서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부분 가족이나 애정관계를 다루는 국내 드라마의 특성상 감정선의 폭발은 곧 시청률로 직결된다. 때문에 중요한 순간을 직접 목격하든가 통화 내용을 듣거나 하는 감정적인 고조를 애용한다는 것이다. 드라마 작가 C씨는 "여러 장치와 인물을 통해 치밀하게 복선을 까는 외국 드라마 형식이 부럽다"면서도 "그러려면 더 많은 등장 인물과 신이 필요한데 국내 제작여건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장 입에 달다고 엿듣기 코드를 남발한다면 결국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드라마평론가 정덕현씨는 "인물들이 살아있는 존재로 흘러가야 하는데, 작가가 엿듣기 코드를 통해 부자연스럽게 끌어가면서 몰입을 방해한다"며 "이런 억지설정들 때문에 막장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일침했다.
채지은 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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