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그리움, 섬은 동경이다. 바다로 사방이 막힌 작은 땅덩이. 섬은 곧 단절을 의미한다.
바다 건너편 또 다른 섬이나 뭍이 보일 때 간절함은 더욱 커진다. 닿고 싶다. 가서 어루만지고 싶다. 저 땅 위에 발을 디디고 몸을 부벼 저 곳과 하나가 되고 싶다.
하지만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손을 들어 가리키면 애잔함은 더욱 커지지만 그 섬 그 땅으로 뻗친 마음의 촉수를 쉬 거둬들일 수 없다. 그 마음과 마음이 겹쳐지고, 닿고 싶은 열망이 더해져 결국 섬과 섬은 서로를 잇기에 이른다.
섬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신안의 바다 밑은 거대한 뻘밭이다. 물이 빠지면 몇몇 섬과 섬들은 뻘로 연결된다. 섬사람들은 그 이웃의 섬들로 가기 위해 뻘 위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렇게 섬들은 서로를 이었다. 물 빠질 때만 건널 수 있는 이 징검다리를 노둣길이라 했다.
이 징검다리 노둣길이 후엔 차 한대 다닐 콘크리트 포장길이 됐다. 산길로 치면 수풀 우거진 오솔길이 신작로처럼 반듯해진 것이다.
전남 신안에 병풍도란 섬이 있다. 부안의 채석강처럼 층층의 바위 절벽이 섬의 한 쪽을 두르고 있어 병풍이란 이름을 얻은 섬이다. 이 병풍도가 주변의 섬들을 잇고 있는 노둣길은 6개나 된다. 주렁주렁 가장 많은 섬과 가장 많은 노둣길이 이어진 곳이다. 가장 큰 병풍도에서 시작된 노둣길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보기도, 신추도를 잇는다.
병풍도에서 가장 긴 1km길이의 노둣길을 바라보는 언덕에 앉아 지금의 포장길이 아닌 돌 하나씩 밟고 지났을 옛 징검다리 노둣길을 그려본다.
언제부터 노둣길이 있었냐는 물음에 마을 분들은 막연히 “조상님때부터”라고 했다. 몇 백년이 넘은 바닷길이다. 차가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엔 방석만하고 머리통만한 돌들을 이고 지고 날라 한 뼘씩 그 길을 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삐뚤빼뚤하고 미끌거리는 징검다리를 건너 다녔다. 지게 진 짐꾼도 건넜고, 곡식을 실은 황소도 지났다. 일년에 한번씩은 마을 주민 모두 모여 노둣돌 뒤집기를 해야 했다. 이끼가 껴 미끄러워진 돌을 뒤집어 박는 일이다. 힘겨운 노동의 현장이지만 전체가 함께 모여 하는 일이라 그날은 마을의 축제와도 같은 날이었다. 섬과 섬을 잇는 그들의 희망을 닦는 일이기에 그렇다.
새색시 꽃가마도, 북망산천 가는 꽃상여도 이 노둣길을 지나야 했다. 새색시 꽃가마 뒤뚱거리며 지날 땐 가마 안 신부는 혼인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보다 당장 휘청거리는 가마의 안전이 더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아니 이 멀미 나는 혼삿길에서 앞으로 펼쳐질 섬 아낙으로의 지난한 고생길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노둣길은 하루 두 번 뚫리고 또 두 번 물에 잠긴다. 조금때면 물이 조금 덜 들어오고, 사리때면 물이 더 많이 들어온다. 물 들어오는 시간은 매번 다르다. 섬의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땐 물때가 곧 등교시간이었다. 컴컴한 새벽에도 집을 나서야 했고, 컴컴한 밤중에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많은 이야기를 담은 징검다리 노두는 이제 시멘트 포장길이 됐고, 조금, 한물, 두물, 세물, 네물의 물때까지는 항시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길도 높아졌다.
■6개의 노둣길이 7개의 섬을 잇는 신안 병풍도…호젓한 봄 산책길로 그만
신안의 압해도 송공항에서 병풍도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다. 오전 7시에 출발하는 배가 있다고 해서 시간 맞춰 갔더니 아뿔싸, 4월 1일부터 하계시즌이 적용돼 오전 6시에 이미 출발했단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배표 팔던 분이 얼른 차를 몰아 무안군 운남면의 신월항으로 달려가란다. 송공항을 떠난 그 배가 병풍도에 들렀다 도착하는 곳이 신월항이니 그 배가 송공항으로 되돌아오는 뱃길을 타면 오전 중에 병풍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송공항에서 출발하는 오전 11시 배를 마냥 기다려야 했다.
가까스로 신월항 뱃시간에 맞춰 달려갔고, 철부선에 차를 싣고 나서야 한시름 덜었다. 배는 봄볕 가득한 신안의 바다로 나갔다. 봄안개 낮게 드리운 바다는 호수보다도 고요했다. 안개에 둘러싸인 섬들은 스스로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다. 두어 개 섬을 거친 배는 1시간 만에 병풍도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물때를 살폈다. 썰물이 정점을 찍고 이제 조금씩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서둘러 노둣길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병풍도 선착장을 출발해 가장 남쪽의 소악도로 향했다. 병풍도에서 처음 만나는 노둣길은 대기점도를 잇는 1km 길이의 방조제 같은 길이다. 예전 징검다리였을 때에는 덜 깊고 좀더 단단한 데를 골라 돌을 얹다보니 길은 이리 휘고 저리 굽었을 것이다. 하지만 콘크리트 새 길은 방조제처럼 반듯하다. 방조제와 다른 ?중간중간 길 밑으로 양쪽의 뻘을 잇는 물길이 뚫려있다는 것과 물이 많이 차면 잠긴다는 것이다.
나른한 봄햇살을 맞으며 노두를 건너고 다시 대기점도를 가로질러 소기점도를 잇는 또 다른 노둣길을 넘었다. 또 두 번의 노둣길을 건너 소악도 선착장에 이르렀다. 더는 남쪽으로 길이 연결되지 않았다.
소악도 선착장 반대편엔 작고 아늑한 백사장이 있다. 관광지가 아니어서 조용히 호젓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병풍도의 이름을 잇게 한 절벽을 가보고 싶었지만 길이 닿지 않는단다.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노두가 잇는 섬들을 하나씩 건너 다니며 봄빛 가득 담은 섬 분위기에 취한다. 갯벌에선 이제 막 뻘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낙지를 잡는 어르신이 서성였고, 허리 굽혀 굴을 캐는 아주머니도 계셨다. 김 양식장의 장대는 대나무밭처럼 빼곡하게 바다를 메웠고, 이제 막 소금질을 시작한 염전에선 봄햇살을 담은 작은 소금 결정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겨울 뻘 위에 초록 융단을 덮었을 감태는 이제 실타래처럼 긴 흔적만 몇 가닥 늘어뜨리고 있다.
노둣길이 잇는 희망이 감싸 안아서일까. 노둣길이 잇는 섬들엔 따뜻한 봄기운이 내려앉아 미동도 없이 가만히 머물고 있었다.
병풍도(신안)=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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