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손글씨 학원.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숙제 검사부터 했다. 숙제는 봄의 정서와 느낌을 담아 '봄'자를 써오는 것. 수강생 서정완(28)씨가 서로 다른 '봄'자 3개를 내놨다. 그 중 'ㅂ'이 튤립 꽃 모양처럼 둥글고 크고, 모음 'ㅗ'의 세로획은 마치 줄기처럼 길게 늘어졌으며 'ㅁ'은 화분 모양으로 작게 표현된 '봄'자를 선생님은 가장 훌륭한 손글씨로 꼽았다. 그는 "아주 잘 쓴 글씨는 아니지만 봄의 느낌을 조형적으로 잘 표현한 재미있는 글씨"라고 평했다.
이 선생님은 시각장애 손글씨 작가 조원준(35ㆍ본보 2009년 10월9일자 보도)씨이다. 조씨는 스물 여섯 나이에 갑자기 덮친 병마(뇌하수체 종양)로 시력을 거의 잃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절망감에 허덕이다 우연히 시작한 손글씨에 재미를 붙였고, 손글씨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집에서 혼자 영화 타이틀 등의 작업을 하며 지내왔던 그가 지난 2월 말부터 손글씨 전문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시력을 잃은 후 햇수로 꼭 10년 만에 처음으로 직장이 생긴 것.
강의 경력 한달 남짓의 초보 선생님이지만 조씨의 눈빛은 매서웠다. "가장 얇은 획과 굵은 획의 두께가 5배 넘게 차이 나면 안 되는데 이 가로 획은 너무 얇아요."
시각장애 때문에 큰 글씨를 봐줄 수 없는 게 수강생들에게 못내 미안하다. 조씨는 왼쪽 눈의 가시각(可視角)이 정상인의 3분의 1, 오른쪽 눈은 절반에 불과해 가로와 세로가 30㎝ 이상인 글자는 한 눈에 보기 힘들다. 하지만 눈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는 6개월에 한번씩 받는 머리 자기공명영상(MRI)검사에서 지난해 종양이 더 커졌다는 결과를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사실 '종양이 더 커지면 차라리 죽어버려야지'라는 나쁜 생각이 들기도 했다"며 "올해 검사에서는 종양이 커지지 않았고 시력도 더 나빠지지 않아 다행"이라며 웃었다.
아직 제자는 많지 않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간 동안 진행되는 정원 8명의 수업에 3명이 등록했다. 조씨에게 숙제검사를 받은 수강생 서씨는 경기 천안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5년 차 교사이고, 충남 대천에서 갈비집을 운영하는 30대 주부도 3시간을 달려 학원에 온다.
하지만 조씨에게는 각별하다. 그는 "부모님도 밖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고 하니까 사회 복귀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는 벌써 또 다른 꿈도 꾸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손글씨를 장애인 교육이나 재활 등에 활용해 소외계층을 돕고 싶어요." 2년 전 취재 당시, 손글씨를 통해 조심스레 세상으로 나오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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