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A은행은 식품전문기업인 B사와 퇴직연금 유치협상을 벌이다, 뜻밖에 탈락을 통보 받았다. C금융회사가 B사측에 “우리와 관계가 깊은 대형마트의 가장 좋은 진열대에 귀사의 제품을 전시해주겠다”고 제의하자, B사가 마음을 바꾼 것. A은행 관계자는 “10년 이상 거래를 해온 기업이고 조건도 타사보다 좋아 탈락은 생각도 못했다”며 “이런 식으로 협상이 깨지고 뒤집어 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D은행 퇴직연금 사업부는 최근 큰 고민에 빠졌다. 모 대기업이 퇴직연금을 가입하는 조건으로 가입자들에게 ‘상조서비스’나 ‘건강검진’ 같은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은밀한 제안을 했기 때문. 은행 관계자는 “1인당 40만원 가까운 비용을 부담할 형편은 안 되지만 그렇다고 700억원에 달하는 신규 가입액을 놓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50조시장으로 커진 퇴직연금을 놓고 금융권의 사활을 건 전쟁이 벌어지면서, 별의별 백태가 다 벌어지고 있다. 금융기관과 기업간 유치 협상이 ‘파워게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은행들은 중소기업에 대해 ‘꺾기’를 하기도 하고 반대로 대기업에 대해선 ‘역(逆)꺾기’를 당하기도 한다. 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지 모를 혼탁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4일 금융계에 따르면 퇴직연금 시장 쟁탈전이 가열되면서 편법 영업 행태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퇴직연금 시장의 ‘큰 손’인 대기업 영업.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만명에 달하는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은 퇴직연금 시장의 VVIP고객이다.
때문에 이들 대기업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금융권은 지금 ‘올인’중이다. 퇴직연금에 가입해주면 상품권을 준다거나, 건강검진 심지어 상조 서비스까지 주겠다는 제안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다. 아예 대기업들이 노골적으로 ‘플러스 알파’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그 동안 잠잠했던 고금리 경쟁도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퇴직연금경쟁이 고금리싸움으로 변질되자, 금융당국은 보장수익률을 5% 미만으로 낮추라고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지만 이조차도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 실제 올 초 한 공기업 퇴직연금 입찰에서 모 증권사가 6%대의 수익율을 제시했다가 금융당국의 제지를 받고 금리를 조정 바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들어 일부 은행들이 경쟁은행보다 금리를 0.5~0.7%포인트까지 높게 제시하며 고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며 “퇴직연금 유치경쟁이 또다시 고금리 경쟁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최근 들어선 대기업들이 이 같은 경쟁을 이용해 종업원들의 퇴직연금을 자신의 사업으로까지 연계하고 있다. 한쪽에선 은행들이 거래중소기업에 대출을 미끼로 퇴직연금을 가입시키는 ‘꺾기’가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선 대기업이 퇴직연금을 미끼로 금융사에게 자사 상품 구매를 강요하는 ‘역꺾기’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 한 은행 관계자는 “일부 전자업체나 통신업체는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자사 스마트폰 구입, 유무선 전화나 인터넷망 가입 등을 요구하고, 일부 유통업체의 경우 자사 상품권을 사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관계자는 “예전 같으면 기업에 대해 은행이 철저히 ‘갑’의 위치였지만 이젠 완전히 역전됐다”면서 “중소기업에는 여전히 ‘갑’이겠지만 대기업은 ‘을’에 불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퇴직연금 시장 과열 조짐에 대해 감시를 강화할 태세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최근 퇴직연금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편법 행위에 대해서 단속을 강화할 것”이라며 “향후 예정된 금융사 종합검사에서 이 부분을 중점 감시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고 말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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