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들 배고프지?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
경기 가평군 신하리의 김주록(67)씨네 한우 농가. 120㎡ 넓이의 축사에 송아지 7마리가 눈망울을 깜빡이고 있다. 김씨의 부인 이재순(60)씨가 여물을 한아름 안아 송아지 앞에 내려 놓았다. 겁먹은 듯 움츠려있던 송아지들도 배가 고팠는지 이내 머리를 묻고, 여물을 씹기 시작한다.
구제역이 발생한 지도 4개월이 훌쩍 지났다(3일로 127일째). 매몰 가축 347만 마리. 3일 충남 홍성을 마지막으로 구제역이 발생했던 전국 75개 시ㆍ군 전부에서 이동제한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대재앙도 이젠 종료 단계로 접어들었고, 생매장에 피눈물 흘렸던 축산 농민들도 서서히 재기를 향한 몸짓을 시작했다.
김씨는 크리스마스였던 작년 12월25일 인근 농가가 구제역 양성판정을 받는 바람에 키우던 소 51마리가 모두 살처분 됐다. 자식처럼 키우던 소들을 묻은 뒤, 빈 외양간만 쳐다보며 눈물 흘린 지 석 달. 차마 소는 더 못 기를 것 같았지만 "힘 내서 다시 키우시라"는 큰 아들의 계속된 권유에 따라, 최근 7마리를 재입식(농장에 새로 가축을 들여오는 것)했다. 김씨는 "아직 축사가 허전해도 송아지들을 보니 그래도 살 맛이 난다"고 했다.
김씨는 그래도 희망의 불씨를 살린 경우. 구제역을 휩쓸고 간 전국의 다른 농가에선 아직 본격적인 재입식이 시작되지 않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축사 청소 및 방역관 점검 등을 거쳐야 해 경기 가평ㆍ강화 등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만 재입식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상처가 너무 깊어 다시 소, 돼지를 키울 엄두를 못 내는 농민들도 많다. 언제 또다시 구제역이 올지 몰라서, 더 이상은 산 짐승을 땅에 묻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아예 재입식을 포기한 농가도 적지 않다.
막상 재입식을 하려 해도 소, 돼지가 절대 부족한 상황. 살처분으로 수도 줄어든데다, 가격상승을 기대해 일부 농가들이 물량을 내놓지 않는 탓도 있다. 김씨도 지인에게 부탁해 간신히 송아지를 구했다. 그는 "살처분 보상금에서 대출금, 사료대금 등을 갚고 남은 1,400만원을 모두 송아지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며 "나는 그나마 빨리 구해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재입식 후에도 갈 길은 멀다. 송아지가 커서 낳은 새끼를 다시 길러서 팔 때까지는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김씨도 미지급 보상금을 받으면 생활비를 우선 떼고 나머지 돈으로는 소를 더 들여올 생각이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막막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들이 희망이야. 잘 키워야지. 그리고 다시는 구제역 같은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지."
가평=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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