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동물의 왕국’에서 북극해를 유유히 헤엄치는 어린 흰돌고래, 펭귄의 모습을 보면서 왜 얼굴도 모르는 그들이 문득 떠올랐을까. 올해 들어 벌써 3명이나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카이스트 학생들. 곧 북빙양보다 훨씬 넓은 세상이라는 바다로 나와 마음껏 뛰놀았어야 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다. 개개인의 사정은 달랐다고 하지만, 카이스트의 교육 시스템이 우선 도마에 올랐다. 한국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다는 국립 특수대학, 그곳이 구성원들 간의 경쟁이 지배하는 ‘고독한 영재들의 섬’이 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서남표식 대학개혁이 초래한 결과라는 비판도 나온다.
2006년 카이스트로 온 서남표 총장은 교수 정년보장 심사를 강화해 연구실적이 부진한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키고, 무상교육을 받던 학생들에게는 성적이 부진할 경우 수업료 면제 혜택을 없애는가 하면, 모든 강의를 100% 영어로 하도록 했다. 대학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카이스트 구성원들에게는 성과ㆍ경쟁 지상주의로 몰아갈 수도 있는 제도들이다. 2009년 서 총장 연임시 거센 찬반 논란이 일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징벌적 차등 등록금제’로 불리는, 성적에 따른 등록금 제도는 그 자체가 비교육적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학점이 3.0 이하인 학생은 학점이 0.01 낮아질 때마다 6만3,000원을 벌금처럼 내야 한다. 학점이 2.0일 경우 한 학기에 무려 630만원을 내야 한다. “세상 어느 학교에서 공부 못한다고 돈 더 내라고 하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이건 교육이나 경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징벌이다. 경쟁은 과정의 가치일 뿐 그 자체가 궁극의 가치일 수 없다.
물론 학생들의 잇단 자살의 원인을 이 제도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카이스트가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자살이 사회적인(개인적이 아닌) 사실이자 현상이라는 것은 현대 자살 연구의 공통된 결론이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한 데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는 ‘자살 대국’ ‘자살 공화국’이라는 사실은 이제 이야깃거리도 못 된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즉 아직도 자살을 애써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는 우리사회의 위선이 문제인 것이다.
“완강하게 돈을 움켜쥐기에만 급급했다. 웃는 경우에는 기뻐서라기보다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마음이 컸다. 부자들은 눈앞이 핑 돌 정도로 많은 집세를 갈취했으며 터무니없이 이자를 우려냈다. 쉴 새 없이 능력을 증명해야 했으며, 혐오스러운 직장 동료들은 기회만을 엿보다가 약한 자가 있으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몰아붙이고 괴롭혔다.”
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단체여행을 떠나면서 서로 유대를 확인하고 삶의 욕구를 다시 찾는다는 이야기를 그린 핀란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 에 나오는 구절이다. 국민들이 세계 최고의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핀란인들에 대한 묘사이지만, 이게 그 나라 사람들만의 이야기인가. 그대로 한국 사람들, 한국사회에 대한 묘사다. 핀란드는 자살률이 1990년 인구 10만 명당 30.3명(한국은 2008년 현재 인구 10만 명당 24.3명)이나 될 정도였다. 파실린나가 저 소설을 쓴 해도 1990년이다. 하지만 자살예방 국가전략까지 세우는 노력으로 지금은 한국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처럼 안타까운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사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사람 살맛 나는 세상이 되어야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젊음아,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 살아서 복수해라. 한때 우리를 죽음의 유혹에까지 몰아갔던 이 세상을 어떻든 살아남아서 바꿔놓아라. 경쟁만큼이나 유대가, 성과만큼이나 과정이 소중한 공동체로.
하종오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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