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시장경제에는 큰 모순이 하나 있다. 사유재산권이 그 기본 원리지만, 사유재산이 형성되는 과정은 시장의 논리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주체인 기업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대기업이 그렇다.
기업에 대한 재산권은 기업주의 출자와 근로, 혁신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대기업은 정경유착과 관치 등으로 자라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구체제의 유산이 있는 유럽은 물론이고, 순수배양적 자본주의라는 미국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19세기 말 미국의 대기업가는 ‘강도 남작(robber baron)’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상속세 제대로 물려야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대기업인 재벌은 구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경유착 관치를 통해 성장했다. 창업자들의 능력도 중요했지만, 한국 재벌이 그런 식으로 자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처럼 재벌이 과거 정부의 지원 하에서 컸으니 이제 그 이익 일부를 내놓아야 하는가. 일각에서는 그런 생각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것까지 추적해서 사유재산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경제의 그런 보편적 모순을 한국이라고 해서 해결할 뾰족한 방법은 없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재벌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다. 재벌기업은 시간이 갈수록 총수 일가의 지분이 엷어지면서 경영권을 장악한 총수 일가와 소액주주들의 이해가 맞지 않게 되었다. 이런 구도 하에서 총수 일가가 소액주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그 주된 방법이 계열기업 간 내부거래다. 이 방법은 주로 편법 상속에 쓰이고 있다. 총수 자녀들이 소유하고 있는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고, 그렇게 해서 기업가치가 커지면 주식을 공개해 자녀들이 손쉽게 떼돈을 벌고, 그 돈으로 핵심 계열사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물려받는다. 한다 하는 재벌이 모두 이런 식으로 2, 3세에게 수 조 내지 수십 조원씩 재산을 상속했다.
물론 상속세는 쥐꼬리만큼 낸다. 이것은 재산권 침해만큼이나 문제다. 자본주의 경제의 재산권 모순을 직접 해결할 수 없다면 상속세로 부의 세습을 제한하는 것이 차선책은 된다. 편법 상속은 그런 장치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는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 재벌에게 상속세를 제대로 물리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고 한다. ‘초과이익 공유제’ 같은 것으로 헛발질을 하던 정부가 제대로 된 대책을 들고 나온 셈이다.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총수가 주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데 대해 주주가 자기 이익을 스스로 챙길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주가조작이나 분식회계에만 적용하던 집단소송을 편법상속에 적용하는 것은 어떤가. 물론 현재 기업과 법조계의 현실로 보아 여기에는 온갖 어려움과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문제가 적은 방안을 찾아내겠다는 의지다.
재벌도 안이한 생각 탈피를
한국의 재벌문제는 1997년 위기 후 어느 정도 개혁을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상태다. 지금 새삼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현 정부가 초기에 재벌 편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도 늦은 것은 아니다. 재벌은 이런 조치에 대해 반발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에서 협조해야 할 것이다. 구미의 대기업가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강도 남작’의 모습을 털어낼 수 있었다.
정부와 재벌은 이 문제를 안이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공정사회론’이 그렇게나 파괴력을 갖게 된 한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선진화의 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미룬 숙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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