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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수 4년만에 낸 소설집 '귀가도'/ 착해서 고통받는…남 같지 않은 우리네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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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수 4년만에 낸 소설집 '귀가도'/ 착해서 고통받는…남 같지 않은 우리네 이웃들

입력
2011.04.03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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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에게 제집 안방을 빼앗겨 놓고 '나가라'는 말도 못하고 돈까지 뜯기는 이가 있다면. 그런데도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라며 태연하고 "처자식까지 데려오지 않는 걸 보면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다"고 두둔한다면. 그렇다.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이다. 이름도 유순봉, 어리숙하고 유순해서 주변인 모두 그를 이용해 먹는 이웃의 봉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라면.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밀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액자화한 성경 구절이 걸어 나온 이라면.

소설가 윤영수(59)씨가 4년 만에 낸 소설집 <귀가도> (문학동네 발행)의 단편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속 주인공 유순봉은 근래 보기 드문, 인상적 캐릭터다. 읽는 내내 답답해 터질듯하던 복장은 책을 덮고 나면 뭉근히 아리고 머리는 의문문으로 뒤숭숭하다. '착하고 진실함'의 의미란 무엇인가. 이 어리석은 양에게서 불시착한 성자(聖者)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에라스무스가 예찬한 어리석음의 성스러움 때문일까.

이야기는 TV 프로그램'긴급출동 SOS'에 나올 법한, 실제 작가도 이 프로에서 착안한 황당한 사건이 중심축이다. 가구 공장 잡부인 가난뱅이 유순봉 가족의 단칸 집에 뜬금없이 조폭 출신 기천웅이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더니 우물쭈물하는 사이 집 주인 노릇을 한다. 이 어이없는 동거기간이 3년. 보다 못한 동서네가 TV 프로에 제보해 의기양양한 PD가 나서는 과정을 유순봉의 시선에서 그려간다.

문제적 지점이라면 유순봉이 남들 눈엔 덜떨어져 보이지만 그 내면은 온갖 불행 속에서도 긍정과 감사를 발견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PD도 화가 나는 거였다. 불쌍하고 힘들어 해야 화면이 나오는데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죠"라는 식이니. 유순봉을 되레 윽박지르는 PD 역시도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쥐고 마는"(151쪽) 기천웅과 같은 인물. 유순봉의 재산을 채간 동서네나 그의 월급을 엉큼하게 떼먹는 직장 동료 모두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쁜 한 통속이다. 작가는 유순봉이란 거울을 통해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과 늑대적 면모를 가슴 뜨끔하면서도 서글프게 파헤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유순봉은 제 욕심을 비워 낸 일종의 백지인 셈인데 그가 모자라고 우유부단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善)이란 게 지독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쩌면 악이 선의 결핍이 아니라 선이 악의 결핍인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집은 이를 포함해 6편의 단편이 묶였는데 소소한 일상이 애잔하면서도 따끔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도시철도 999'는 지하철 2호선의 전철 안 풍경을 배꼽 잡을 만큼 익살스럽게 그리고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는 평생 부인을 가정부 부리듯 해 온 남편이 부인의 일기를 보며 반성한다는 내용인데 두 편 모두 위세 떠는 선의(善意) 밑에 감춰진 허위의식이 풍자적으로 다뤄져 쓴맛의 웃음기가 가득하다. 인물과 상황을 실감 나게 묘파하는 작가의 리얼리즘적 솜씨도 일품이다.

날카로운 얼음 송곳 같기도 하지만 소설집은 시종 따뜻한 입김을 잃지 않는다. 아마도 삶의 귀퉁이에 몰린 이들에 대한 작가의 물기 어린 애정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단편 '바닷속의 거대한 산맥'에서 나온 이런 희망처럼. "나도 현준도 그녀도 다 같이 뭉치며 바닷속의 산맥처럼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광포한 물 더미를 함께 견디며 어떻게든 살아 낼 수 있지 않을까."

1990년 38세의 나이로 늦깎이 등단한 후 97년 <착한 사람 문성현> 으로 한국일보문학상, 2006년 <소설 쓰는 밤> 으로 만해문학상을 받았지만 작가 생활 20년 동안 소설집을 이전까지 고작 6권밖에 내지 않은 과작의 작가다. 흔히 작가들이 같은 소재나 같은 주제를 계속 다루면서 색깔을 만들어 가곤 하는데 그는 오히려 그 점을 경계한다. "자기 복제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껏 장편소설을 내놓지 않은 것도 이런 엄격한 자기 검열 탓이었다. "두 편 쓰긴 했는데 스스로에게 단호할 필요가 있어서 발표하지 않았어요. 종이만 낭비할 바에야 안 내는 게 낫겠다 싶었지요." 그렇게 장편을 미뤄 왔던 그는 이제 본격적 장편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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