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이슈' 잡지 판매하는 노숙인 쉬어가세요"밖에서 지친 몸 잠시라도…"치과·북카페 등 17곳 참여대화 나누며 위안처 역할도
지난달 31일 오후 노숙인 한유형(55)씨가 잡지 '빅이슈'를 실은 수레를 끌고 서울 지하철 사당역 3번 출구 부근 '내이처럼 치과'로 들어섰다. 잡지 판매가 목적이라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 한씨는 당당하고 표정도 밝다. 옥용주(35) 원장도 반갑게 맞았다. "오늘은 몇 권이나 파셨어요." "월말이라 좀 적네요, 쉬러 왔어요." 오고 가는 대화도 살갑다.
한씨가 의자에 앉아 뻐근한 다리를 주물렀다. 내친 김에 옥 원장이 한씨의 치아를 살폈다. 옥 원장은 "처음 왔을 때는 깨진 앞니가 드러날까 웃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자신 있게 미소를 지으시네요" 하곤 함께 웃었다. 두 달 전 옥 원장이 한씨에게 해 넣은 의치가 빛났다. 옥 원장은 50만원을 호가하는 의치를 한씨에게 5만원에, 그것도 5주에 걸쳐 1만원씩 무이자 할부로 해줬다.
둘에게 비결을 묻자 병원 입구를 가리켰다. 정문엔 '빅이슈를 응원합니다'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빅이슈' 판매원의 쉼터인 '빅숍'을 뜻한다고 했다. 1991년 노숙인의 자활을 돕기 위해 영국에서 창간한 '빅이슈'는 지난해 7월 빅이슈코리아에 의해 국내판 발행이 시작됐다. 노숙인이 3,000원짜리 한 권을 팔면 1,600원을 가져가는 구조다.
빅이슈코리아는 지난해 11월부터 빅숍을 모집했다. 잡지를 파느라 길게는 하루 8시간을 길에 서있는 노숙인 판매원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자는 취지였는데, 현재 사당동 신촌 대학로 등 서울시내 판매소 부근에 17곳이 운영 중이다. 치과를 비롯해 식당 찻집 서점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성북구 동선동 북카페 '소일'의 노모(35) 사장은 "평소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곳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지난해 빅숍에 동참했다. 인근 지하철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빅이슈' 판매를 하는 구영훈(45)씨는 "무척 추운 날이 많았던 올 겨울, 꽁꽁 언 몸을 이곳에서 녹이곤 했다"고 고마워했다.
하지만 모집 초기만 해도 노숙인에 대한 편견 탓에 거들떠보지 않는 상점이 대부분이었다. 빅이슈코리아의 조현성(27) 활동가는 "올 1월 흑석동 중앙대 앞 상점을 20곳 넘게 돌아다녔지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다'며 쫓아내기 일쑤였다"고 했다. 아직도 중앙대 앞 판매원은 쉴 곳이 마땅찮다.
그나마 먼저 손을 내미는 상점이 종종 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 신촌 이화여대 앞 한정식집 '수라'의 홍정미(38) 사장은 "판매원의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아 빅이슈코리아에 직접 연락해 빅숍이 됐다"며 "무거운 가방을 보관해드리고 가끔 식사도 제공한다"고 말했다.
판매원들에게 빅숍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다. 사회와 단절됐던 이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양재동에서 동선동으로 옮겨온 구영훈씨는 "월말에는 사장님께 판매량이 적다는 푸념을 편하게 늘어놓을 정도로 낯선 동네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했다.
현재 서울시내 '빅이슈' 판매소 37개 지역 중 빅숍이 없는 곳은 22곳에 이른다. 빅숍 17곳 중 사당동과 홍대 앞엔 두 곳이 있기 때문이다. 빅이슈코리아는 빅숍을 50곳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활동가들을 파견, 상점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노숙인들에게 의자 하나를 양보하는 따뜻한 마음만 있으면 어디든 빅숍이 될 수 있다.
글ㆍ사진=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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