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제대로 매듭지어진 것 같은데 영 개운하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기자회견에서 한 말들은 사리에 맞고 상식에 부합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며 제시한 이유도 수긍할 만하다. 대선 공약이었기에 내각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목도 그렇다. 옳은 결정이고 맞는 말인데 꾸역꾸역 밀려드는 '찜찜한 기분'은 어디서 오는가. 결정 과정에서 신뢰를 얻지 못했고, 대통령의 호소에서 감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공항 입지 발표 당일인 지난달 30일 아침 신문을 펼쳐 든 국민들은 의아했다. 발표날인데 입지 선정을 위한 평가단이 하루 전에 후보지인 경남 밀양과 부산 가덕도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들이 실렸기 때문이다. 27명의 평가단이 하루에 두 곳을 휑하니 구경하고 돌아갔으니 아무리 전문가라 할지라도 그 행사가 믿음직하게 비쳤을 리가 없다.
신공항 백지화 이해 못할 대목
앞서 10명으로 구성된 평가위원회는 24, 25일 가덕도와 밀양을 하루씩 방문했다. 위원회는 그 곳에서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항공기 소음이 얼마나 될까, 이착륙에 장애가 되는 산이 저것이냐 등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위원회가 채점을 위한 세부항목과 가중치를 정하고, 평가단이 각 항목에 점수를 매기면, 국토해양부는 가중치를 계산하여 채점을 했다고 한다. 위원회, 평가단, 국토부가 절대적으로 독립하여 '출제-채점-평가'를 했으니 믿어달라는 얘기다.
부산시가 가덕도 신공항 건설안을 국토부에 제출한 때가 2008년 12월이고, 한달 뒤인 2009년 1월 경남도가 밀양안을 제출했다. 입지선정에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가진 '채점 담당'인 평가단이 하루에 현장 두 곳을 확인하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와 다음날 아침 채점을 하고, 바로 국토부가 평가를 완료하고 국무총리가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한 뒤 공식 발표를 한 시각이 오후 3시30분이었다. 최소한 2년 이상 가늠하던 국가사업을 이렇게도 전광석화처럼 처리하여 39.9점과 38.3점이라는 절묘한 점수를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결정과정에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다.
국민들이 갖고 있는 찜찜한 기분을 해소하려면 정치적 감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신공항 문제의 경우 그것은 당연히 이명박 대통령의 몫이다. 내용을 흘려 예방주사를 맞히고(화요일), 총리가 결과를 발표하고(수요일), 국민과 정치권의 반응을 기다렸다가(목요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는(금요일) 식의 일정조정으로는 국민에게 아무런 감동을 줄 수가 없다. 게다가 총리 발표에 대통령의 유감표명을 전언 형식으로 곁들여 또 다른 예방주사를 놓은 꼴이 아니었던가.
대통령이 앞서서 정면돌파를 했어야 옳다. 대선 공약에 대한 사안이기에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총리나 내각을 앞세울 일이 아니었다. 그 일정조정이 거꾸로 되었다면 감동이 찜찜함을 누를 수도 있었을 게다. 국민에게 직접 약속했던 대통령이 먼저 입장을 밝히고, 국민과 정치권의 반응을 듣고, 총리와 내각이 상황을 설명하며 후속 조치를 밝히는 순서로 이어졌어야 했다는 얘기다.
감동을 주지 못한 대통령 사과
국민을 향해 이 대통령이 사과나 송구의 뜻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일은 수입쇠고기 촛불시위 때, 세종시 수정안 추진 때에 이어 크게 세 번째다. 앞서 두 경우에 비해 이번 신공항 문제는 보다 자연스럽게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지못해 나서는 듯한 모양을 보이면서 사과는 사과대로 하고, 갈등은 갈등대로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정치인이 선거에서 했던 공약이니 빠짐없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을 만큼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 하지만 그 약속이 잊혀지거나 불발될 경우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신뢰할 수 있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국민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어떠한 수사(修辭)라도 별 의미가 없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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