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었지 드라마는 하지 않겠다는 연기자들이 있다. 꼭 영화가 좋아서도 아니다. 드라마는 늘 쫓겨 도무지 제대로 연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대본이 늦어 방송 날짜에 맞춰 밤새 촬영하기에 바쁘니 캐릭터 분석이나 연기 몰입은 언감생심이다. 방송 1주일 전에만 대본이 나와도 감지덕지이다. 하루 전은 예사이고, 당일 대본을 받아 허겁지겁 촬영하고, 편집해 내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작가의 집에 사람이 기다렸다가 대본 몇 쪽씩을 녹화장으로 날라가면서 찍는다. 연습은 고사하고 한 치 앞 연기 상황도 모르기 일쑤다.
■ MBC TV 의 주연배우 조민기가 "(작가가) 녹화 당일 배우들에게 (대본을) 던져주며 배우들이 제대로 못해준다고 하더라"라고 한탄하면서 드라마의 쪽대본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어디 뿐이랴. 전작인 역시 매회 촬영 직전에 대본이 나왔단다. 최수종은 KBS 2TV 에서 대본이 늦어 대사 외우는 데 애를 먹었고, 배역인 장일준이 대통령이 되는지 못 되는지도 모르는 채 연기했다. SBS의 은 당일치기로 녹화, 편집을 줄타기하다 화면조정용 컬러바가 뜨고, 음악을 빼먹는 사고까지 냈다.
■ 쪽대본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완성도를 갉아먹는 독소이니 "없애자"고 수없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방송사는 버릇처럼 전작제(全作制)를 다짐했다. 그러나 말 뿐이었고, 몇 회분이라도 미리 찍어놓고 여유 있게 방송하는 '개선안'조차 외면해왔다. 그래서 작가가 감기라도 걸리면, 연기자가 조금만 다쳐도 어김없이'결방'으로 이어지거나 구차한 하이라이트로 때운다. 외주 제작이 많아지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마찬가지다. 지상파 TV 방영에 목을 매고, 그들의 입맛에 맞춰야 하는 지금과 같은 구조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 때론 고약한 작가 탓도 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연출자와 연기자를 길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늑장을 부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인기 작가일수록 그런'횡포'가 심하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에 있다. 작가의 계획과 의도, 연기자의 이미지는 뒷전이다. 인기에 따라 줄이고 늘리고, 바꾸고, 극단적 자극과 선정을 예사로 반복하도록 강요한다. 한심한 출생 비밀의 드라마들이 판을 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배우들까지 연기에 대한 자부심을 잃었다.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정말 막장이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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