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매섭고 질겼다. 거대한 몸뚱이는 통째로 찢겨진 채 여전히 나뒹굴고 있었다. 감당 못할 무게 탓에 치우기 쉽게 토막을 냈건만 여전히 길이 20m에 성인 남성이 두 팔로 껴안아 겨우 깍지를 낄 수 있는 덩치였다. 붉은 빛깔에 밑동부터 가지 윗부분까지 두께가 일정한 안면송의 특징을 온몸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저 버려진 나무토막으로 여겼을 것이다.
3일 오전 충남 태안군 안면읍 조개산 일대 자연휴양림은 여전히 폐허였다. 지난해 9월2일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곤파스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지고 있지만 안면도의 나무들은 날것으로 당시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었다.
휴양림에 들어선 지 5분도 안돼 뿌리째 뽑힌 안면송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동민(71)씨가 "저렇게 꺾였는데 얼마나 아팠을까"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관람객이 오가는 곳부터 치웠다지만 3.5㎞ 산책로엔 뿌리까지 드러난 나무가 30여 그루 이상 됐다. 곳곳엔 1m 길이로 잘라놓은 가지 더미도 여전히 쌓여 있었다. 부러진 가지를 옆 나무에 간신히 걸치거나 당시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할퀴어 노란 속살이 드러난 녀석들도 있었다.
곤파스는 안면송의 집단군락지인 안면도 휴양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안면송 등 7,500여 그루를 망가뜨렸다. 안면송은 고려시대부터 궁궐의 자재나 뱃머리로 사용할 정도로 튼튼한 목재다. 그런 귀한 나무들이 뿌리째 뽑힌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본 주민들은 "한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나뭇가지들이 수북했다"고 말했다.
이날 휴양림을 찾아온 손님들은 주민들에겐 희망의 전령사였다. 환경단체 '생명의숲'이 주관하고 유한킴벌리가 후원하는 '생명의 나무심기 및 숲 가꾸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60여명이 식목일을 맞아 안면송 200여 그루를 심었기 때문이다. 김승순 생명의숲 활동가는 "매년 식목일 주간에 이뤄지던 나무심기를 좀더 뜻 깊은 곳에서 해보자는 취지에서 자연재해 현장인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정성을 다해 심었지만 태풍 이후 안면송은 또 다른 위험에 노출돼 있다. 잎이 넓고 높이 자라는 난대성 활엽수와의 경쟁에서 안면송 등 소나무가 절대적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안면도 휴양림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지구 온난화로 10년 전부터 치고 올라온 쪽나무 상수리나무 등 낙엽활엽수가 소나무의 생육을 가로막기 때문에 수시로 간벌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며 "사실 지난해 쓰러진 소나무 중 상당수는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탓도 있다"고 했다. 경쟁에 뒤져 태풍 피해가 컸고, 이후에도 다시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난대성 병해로 인한 피해도 우려된다. 생명의숲 이수현(41) 사무처장은 "최근 나무들의 건강상태가 급속도로 악화했다"며 "소나무 재선충 등 몇 년 전 경남지역에 큰 피해를 입힌 병해는 원래 중부지방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복구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현장 산림기술사 이임영(49)씨는 "100년 안에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질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며 "활엽수가 위쪽으로 올라오면서 장기적으로 안면송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의 설명에 땀 흘리며 안면송을 심은 참가자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난해에 이어 가족과 참여했다는 반현주(46)씨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있는 소나무 숲이 5년, 10년 뒤엔 기반이 흔들릴 거라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며 "온난화에 따른 환경 변화에 대해 정부가 꾸준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개인적으로라도 나무를 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생명의숲은 기후변화에 대응할 삼림을 만든다는 목표로 2013년까지 지역 특성에 맞는 나무 100만 그루를 심고 관리한다는 계획이다.
태안=김현수 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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