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 키우는 학생 평가] 학교는 '편법과 거짓' 수업 중"1등급 잘 키워 명문대 보내자"우등생에 점수·賞 몰아줘박탈감에 자퇴하는 학생 속속대학, 학생부 비율 낮추며 불신
"중하위권이 돋보이는 학생부 갖기는 쉽지 않죠. 학교에선 주로 1등급 학생을 밀어주니까요."
서울 소재 공립 A고 3학년 K(18)군은 지난 학기 황당한 일을 겪었다. 4,5명 학생이 조를 이뤄 함께 글을 써 내는 국어과 수행평가에서 조원 전원이 같은 결과물을 제출했는데도 점수가 다르게 나온 것. 평소 1등급 학생은 점수가 높게, 낮은 등급 학생은 낮게 매겨졌다. K군은 교사에게 '내용이 같으니 점수도 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기여도 등 개인평가 항목이 있다'는 답을 들었다. 교사의 기준을 납득할 수 없었던 K군이 다시 기준을 물었지만 이번엔 'SKY(서울ㆍ고려ㆍ연세대) 지원할 거 아니면 도를 넘지 말아라', '공부도 못하는 게 왜 아는 척을 하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중ㆍ고교 학사관리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는 매우 낮다. 절대평가 등을 적극 도입하는 대다수 선진국들과 달리 국내 중ㆍ고교에서는 상대평가, 내신등급제 등을 기반으로 학생 성적을 평가한다. 이유는 공정성 확보, 공정한 입시를 위해서다. 하지만 공정성 확보와 창의인성 교육 정책이 뒤엉킨 학교 현장에서 일부 학교들은 '1,2등급 잘 키워 명문대 보내자'며 평가 결과를 왜곡하기도 하고, 심지어 부정을 저질러 학생과 학부모를 좌절시키고 있다.
또 다른 공립고 B군(18)은 "교내 경시대회 생활우수상 학업우수상 표창 등은 원래 명문대 진학생 퍼주기용"이라며 "학생부에 수상경력 한 줄 채우기 위해 목숨 거는 학생들이 많은데, 학교에서 한정된 교내상은 대체로 학업 우수생들에게 몰리는 것을 선생님과 애들이 당연시한다"고 했다. 그는 "애초에 기준을 세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중간ㆍ기말고사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순서대로 뿌리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경기 소재 특목고인 C고 2학년 E(18)양은 3학년 진학을 앞둔 지난해 자퇴했다. 명문으로 알려진 학교라 기대를 안고 입학했지만 늘 '저평가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E양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점수와 상을 가져가고 벌점을 피해가는 학생은 정해져 있었다"며 "오죽하면 학생들끼리도 '서울대 못쓰는 주제에 말 시키지마'라는 폭언을 할 정도"라고 했다. E양은 결국 '이럴 바엔 내신 없이 혼자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떠났다.
일부 고교들이 이런 '꼼수'를 부리는 것은 도덕불감증과 대학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서울 소재 사립 E고 국어과 교사 H(27)씨는 "입학사정관제 등의 평가기준이 모호해 명문대 지원 학생의 학생부는 완벽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며 "대입 성적이 좋아야 좋은 신입생이 들어오고 또 그래야 암암리에 진행되는 대학의 고교등급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있다"고 했다.
범죄 수준의 내신 조작도 끊이지 않아 이를 경험한 이들의 좌절감은 거의 회복불가능이다. 최근 교감이 한 기업인 자식에게 시험지를 유출해 이 학생 석차가 전교 60등에서 1등으로 올랐다는 의혹이 제기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서울 D고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의 한 학부모는 "의혹을 낱낱이 적은 익명의 투서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며 "학교는 지금까지도 피해를 본 다른 학생들에 대한 구제방법은 말하지 않고, '채점 오류일 뿐'이라고 거짓해명만 반복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서울 B고에서는 교장과 교사가 입학사정관 전형 지원을 앞두고 학생부를 조작하고, 서울 Y고 영어 교사는 자신의 딸에게 기말고사 시험지를 유출했다는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는 등 올 들어서만 서울에서 성적 조작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벌써 3건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들은 고교 학생부를 믿지 못해 대입 반영 비율을 경쟁적으로 줄이고 있다. 2010학년도 입학 전형에서 고려대와 연세대는 수능점수만 보는 '우선선발 전형'을 50%에서 70%로 늘렸고, 서울대는 2012학년도 입시에서도 내신을 축소해 수시모집 지역균형선발전형에서 1차 내신 전형을 없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사교육비 절감과 공교육 정상화'라는 명분으로 학생부 위주의 평가 확대를 호소하고 있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창환 선임연구위원은 "교원들이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학생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학생이 그 결과에 신뢰를 보내는 여타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평가에 온정주의가 지나치게 개입되고 있다"며 "성적 관련 비리를 범죄 차원에서 엄단하고 평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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