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복수극이다. 신정아씨의 책 <4001>이 연일 화제다. 폭로성 자전에세이라는 옷에 걸맞게 유명인사들의 실명, 만난 장소, 주고 받은 이야기들을 낱낱이 썼다.
책이 출간되면서 가장 망신을 산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은 "명예를 훼손할 일은 하지 않았다"는 모호한 말로 신씨에게 추근댔다는 폭로를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대중은 신씨가 '증거'로 들이대는 구체적인 진술에 더 솔깃한 듯 하다. 유명인을 끌어들여 눈길을 끌려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신씨가 정 위원장에게 품은 유감을 작정하고 갚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미술계 인사들의 은밀한 얘기들도 드러났다. 그리고 또 혼난 이들이 있으니 기자들이다. 학력위조와 불륜 등 죄의 경중을 떠나 신씨는 관음증적인 보도로 많은 돌팔매를 맞았다. '신정아' 하면 떠오르는 건 학력위조와 정치권 인사와의 불륜만이 아니다. '섹스 스캔들'로 비화한 언론 보도는 누드사진과 성접대, 꽃뱀 등 선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다.
2007년 문화일보가 큼지막한 그의 누드 사진을 게재하며 성접대 의혹을 제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신씨가 문화일보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는 올 1월 8,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조정안에 양측이 합의하면서 마무리 됐지만, 그의 초상ㆍ인격권은 돌이킬 수 없이 침해 당한 후였다. 아직도 그의 얼굴을 합성한 누드 사진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어떤 잘못을 했건 언론이 그의 알몸 사진을 공개할 권리는 없다.
언론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씨는 <4001>을 통해 자신이 당한 그 방법 그대로 되돌려줬다. 신씨는 자신에 대해 "허영과 사치에 물든 여자처럼 기사를 써놓았다"는 어느 기자를 명품 브랜드 세일하는 곳에서 한꺼번에 이십여벌의 옷을 산 '명품족'으로 묘사했다. 인간적으로 친했다던 다른 기자는 안면 몰수하고 앞장서서 돌을 던졌다며 비난했고, 어느 정치인이 기자 시절에 택시까지 따라와 추행을 했다고 고발하기도 했다. '특종만 좇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 속에서 "건강 챙기라"는 메일을 보냈다는 모 논설위원의 인간적 면모를 거론하면서도 그에게 사비로 항공권을 사준 적 있다는 비화를 밝혔다. 자신이 검찰 조사 중 잠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새우깡과 짱구가 먹고 싶다'고 했다는 기사를 쓴 신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런 기사가 신문의 1면 톱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조소했다.
실명이 거론된 기자나 언론사가 부정을 하든 변명을 하든, 이미 세세한 상황이 활자화해 공개된 이상 소명하는 것 자체가 더 주목을 끌게 된다. 언론이 신씨에게 낙인을 찍은 그 방식 그대로 신씨 역시 그런 보도를 한 기자와 언론사를 낙인 찍어 버린 것이다.
<4001>을 펴낸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는 "복수극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추측성 보도에 대해 한 번도 아니라고 사정을 말할 수 없었던 신씨의 항변"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신씨와 기자들의 입장이 역전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출판시장 불황으로 초판 3,000부도 버겁다는 요즘, <4001>은 벌써 10만부를 찍었다고 한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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