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간 애정, 법 영역 아니다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부녀를 기망,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 형법조항을 아십니까. 바로 혼인빙자간음죄(혼빙간음죄)입니다.
지난 주 국무회의를 통과한 형법 개정안이 혼빙간음죄 조항을 삭제했다고 합니다. 지난 세태를 반영한 이 법이 위헌 결정 16개월 만에 드디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혼빙간음죄는 1955년 제정 이후 50년 이상을 존속했지만, 그런 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현실에서보다는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에 더 많이 등장했지요.
지난해 막을 내린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를 기억하시는지요. 이 극에서 ‘왕재수’라는 남자와 ‘어영’이라는 여자는 말 그대로 수상한 관계입니다. 왕재수는 어영과 5년간 사귀다 헤어졌는데, 그녀가 자기 부하와 사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전제로 다시 만나자고 합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영은 왕재수를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하려고 합니다.
혼빙간음죄는 이런 드라마적 상황에나 어울릴 정도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성의식이 개방적인 자유연애시대, 더구나 각 분야에서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세상에서 유독 남성에게만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부녀를 기망, 간음한’ 죄를 묻는다는 것은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여성의 존재가 엄연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성이 결혼을 빙자해 남성에게 피해를 주는 역혼빙도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혼빙간음죄 폐지를 남성이나 여성,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만 저울질하는 오류는 더 이상 없어야겠지요.
남녀가 사귀다가 결혼을 전제로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다 보니 서로 맞지 않은 구석이 많아서 자주 다퉜습니다. 결국 남성은 여성에게 헤어지자고 했고, 여성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혼빙간음죄로 “쳐 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것이 혼빙간음죄가 적용되는 일반적인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남녀관계에서 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상대를 속였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겠지만, 만나고 헤어지고의 문제는 본인들이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요.
순결이란 무엇인가
사회 변화와 함께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법이 마무리하는 순서로 혼빙간음죄는 종언을 고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시대에 뒤진 낡은 법이 없어진 것이라고만 볼 사안은 아닙니다. 이후의 상황을 주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건이 상징하는 것은 순결의 재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성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법입니다. 가능하면 한 사람만 만나면 좋겠지만, 결혼상대를 찾는 여러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상대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지면 무슨 약속이든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약속이 지켜지면 좋겠지만, 마음이 변하는 사람이 꼭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녀관계에서는 매력을 느끼는 쪽이 있으면 실망하는 쪽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과 양심입니다. 여러 과정을 통해 상대를 만나고, 만남 후에는 그 상대만을 생각한다는 새로운 정의가 내려질 때가 됐습니다. 그것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만남 현장에서 토론이 자주 벌어집니다. 대부분의 남녀들은 “나를 만난 이후 나만 생각하는 것”을 순결이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의식입니다. 21세기의 순결은 바로 신뢰인 것입니다.
혼빙간음죄가 사문화한 후 신뢰와 책임감으로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 남녀본색
혼인빙자간음죄 폐지와 관련, 이 법의 보호대상자였던 여성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결혼정보회사 선우 부설 한국결혼문화연구소는 20~40대 미혼여성 200명을 대상으로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한 인식을 알아봤다.
조사결과, 전체의 67.5%가 혼인빙자간음죄 폐지를 찬성했다. 남녀평등에 어긋나는 구시대적인 사고, 본인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 법 악용 우려 등을 이유로 손꼽았다. 폐지를 반대한 여성은 전체의 29%였다. 이성관계에서는 여성이 약자일 수 있으므로 보호해야 한다, 책임감이 결여된 남성이 이성관계를 악용할 가능성이 크므로 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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