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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5> 첫 작품 <최후의 유혹>(1953)과 유현목, 그리고 절구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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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5> 첫 작품 <최후의 유혹>(1953)과 유현목, 그리고 절구통 사건

입력
2011.03.2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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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졸지간에 부모를 잃은 내게 주어진 상속금은 결국 내 첫 작품이 됐다. 삶과 죽음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이고 어찌 보면 세상의 순리인 듯도 하다. 한 세대는 죽고 다음 세대는 자라서 앞 세대를 계승한다. 먼저 죽은 세대는 다음 세대의 자양분이 되니 피상적으로는 삶과 죽음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영원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리라.

모습을 달리한다고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은 다른 모습이지만 동질의 영원성을 지닌다. 부모님의 상속금은 내 영화로 거듭 태어났고, 재가 돼 버린 나의 첫 영화 '유혹의 거리'(1950)도 '최후의 유혹'(1953)로 부활하게 됐다. '최후의 유혹'은 폭격으로 산화 돼버려 가슴에 묻은 '유혹의 거리'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고 싶었던 듯 전화 속 피난터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최후의 유혹'의 시나리오는 유현목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고하게 된다. 이 영화를 위해 조감독으로 박승복(KBS PD로 은퇴), 서석주(KBS PD로 은퇴), 유현목을 기용했다. 유현목에게는 '최후의 유혹'이 영화계 입문작이 됐다. 출연자는 윤일봉, 조항, 독우영, 이택균, 여배우 이민자씨 등이었고 촬영은 김명제 기사가 맡았다. 목욕탕을 빌려서 이경순씨가 녹음을 했고 김봉수 씨가 현상, 김형근씨가 현상 프린트를 했다.

적은 제작비로 완성하기 위해 부산 남포동 거리와 다대포에서 올 로케이션(All Location)으로 촬영을 했다. 가슴 아린 아버지의 유산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부산 부민관에서 개봉을 하였으나 혼란스러운 피난의 와중인지라 관객이 없어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부친이 남긴 유산은 내 첫 작품과 함께 그렇게 사라지게 된 거다. 그러나 피상적인 죽음이 본질적인 죽음이 아니듯이 겉으로는 의미 없이 사라진 유산과 흥행참패로 끝난 첫 극장개봉 영화는 내 손에 절망감만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이 영화를 토대로 난 데뷔라는 통과제의를 거쳐 영화감독으로 비로소 거듭날 수 있었고 전후에 바로 다음 영화를 착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유현목은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한국영화의 한 주축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최후의 유혹'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본질적으로 영화를 통한 영속성의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현목은 훗날 문예영화를 많이 만들어 우수영화 전문 감독이 되었고, '오발탄'(1961)으로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불러왔다고 평가 받았다. 이 뿐만 아니라 이념 갈등, 구도와 신앙의 본질 문제 등 진지하고 장중한 주제 선택과 사회 비판을 위한 도구로서의 영화관, 세련된 연출 솜씨로 한국영화의 거목이라는 별칭을 받은 감독이 된다. 그런 그의 무게감 때문에 유현목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한국영화계의 야사(野史)가 될 수 있는 일면을 들춰보는 것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를 아는 지인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유현목은 평생 술 좋아하고 담배 좋아하고 여성을 좋아했다. '최후의 유혹'을 다대포에서 촬영할 때 민박집에서 머물며 촬영을 진행하는 데 유현목 때문에 여러 번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겪게 됐다.

다대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나가는 배 위에서의 벌어진 일이다. 당시 저고리 밖으로 젖가슴을 내놓은 애기 엄마들 사진이 지금도 간혹 신기한 인류학적 연구대상처럼 호기심 혹은 학문적 차원에서 전시 되곤 하는데,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특별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흔한 일이었다. 아기 젖먹이랴 머리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으랴, 손은 쉬지 않고 뭔가를 다듬고 일을 하며 쉬지 않던 시절이었다. 먹고 살기 바빠 젖가슴은 저고리 바깥으로 내놓다시피 하여 아기들이 배곯지 않게 하는 것이 당시 아낙네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배위에서 커다란 들통에 생선을 넣어 파는 아낙네들의 젖가슴도 여지없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나와 나란히 갑판에 앉아 있던 엉뚱한 유현목이 그만 한 여인의 젖가슴을 만지고 만다. 놀라 기겁을 한 그 아주머니한테 유현목은 한 대 거칠게 얻어맞았고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명색이 최고 책임자인 감독인 내가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 사람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이상해서 지금 정신병원에 데려가는 중이니 좀 양해 해 주세요." 유현목을 미친놈 취급하는 임기웅변을 발휘해 겨우 위기를 모면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시절 가난하던 그 전후의 폐허에서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단벌 신사였다. 밤에 세탁해서 아침에 차려 입고 촬영장에 나서는 게 맥資岵?때였다.

어느 날 촬영이 시작되었는데도 유현목이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서석주 조감독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보냈는데 서석주는 혼자 돌아와 데굴데굴 구르며 웃음만 터트렸다.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에 유현목이 머물던 방문을 열어보니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빨간 목도리를 기저귀처럼 차서 아랫도리에 두르고, 알몸에 넥타이만 한 채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란. "왜 촬영시간에 안 나오고 그러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널어놓은 옷이 마르길 기다리고 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우린 모두 포복절도(抱腹絶倒)를 하고 말았다. 지금도 궁금한 건 '왜 넥타이는 두르고 있었는고?" 하는 점이다. 그 만큼 그는 괴짜였다.

그를 아무리 괴짜로 친다 해도 도저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화가 또 있다. 다대포에서 '최후의 유혹' 촬영을 위해 민박하던 당시 우리가 묵던 민박집 노인 내외가 아침마다 보리쌀을 절구에 넣어 도정해서 밥을 지어주었다. 하루는 아침에 밥을 지으려고 보니 절구통에 물이 고여 있었다고 한다. 비도 안 오는데 웬 물이냐고 고개를 저으며 행주로 절구를 닦아내던 주인 할머니는 이내 기겁을 하고 말았다. 지린내가 진동하는 것이 누가 절구통에 소변을 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도 자백하지 않았고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아침마다 절구통에 소변이 고여 있기를 거듭했다. 하는 수 없이 주인 할아버지가 밤새 절구통을 지키기 위해 방안에서 마당을 엿보니 새벽녘 유현목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절구통 안에 시원하게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정작 당사자인 유현목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본인도 인정했듯이 몽유병이 조금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유현목은 집안 내력이 좀 있다면서 형도 정신질환이 있어 고생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영화 '미몽'(1936)의 감독이자 당대 최고의 대배우셨던 이금룡 선생님도 유현목의 재미있는 일화를 전해주었다. 촬영 때문에 시골여관에서 유숙하는데, 당시에는 흔히 그러했듯 이금룡 선생님과 유현목은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런데 한 밤중에 유현목이 이금룡 선생님의 얼굴을 더듬었다고 한다. 다음은 가슴을 더듬고 차츰 아래로 손이 내려오더니 아랫도리까지…. 그리고선 유현목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이금룡 선생님의 이마를 '탁' 쳤다고 한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란 우리 속담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며 이금룡 선생님은 애꿎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억울해 하셨다고 한다. 동침한 이가 여성인줄 알고 더듬다가 남성임을 깨닫고선 깜짝 놀라 하늘같은 선배의 이마를 후려친 것이겠다. 늘 여성의 손길을 그리워하던 그의 외로운 감성이 느껴져 애틋하기도 하다. 장중한 주제의식으로 일관하던 한국영화의 거목 감독에게도 남모를 외로움이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비단 유현목뿐 아니라 영화인 누구나 전쟁의 와중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을 계속 느꼈을 것이다. 당시 그 외롭고 춥고 가난하고 배곯은 영혼들은 종전과 함께 환도하여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에 모여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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