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의 횡포에 철퇴를 가할 수단인가, 헌법 정신에 합치되지 않는 악법인가.
11일 하도급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논란이 뜨겁다. 논란의 핵심은 이 법이 규정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punitive damages). 기술 유출로 피해가 발생할 때 실제 피해액의 세배까지 배상금을 물리는 장치다.
찬성하는 이들은 극단적 처방을 내려야 할 정도로 기술탈취 피해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강조한다. 하도급 대금을 늦게 받는 건 잠시 괴로운 일이지만, 기술을 도둑맞으면 기업 생명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 일부 원청업체는 특정 하청업체에서 빼낸 기술을 다른 하청업체에 주면서 더 낮은 액수에 계약을 맺도록 경쟁을 유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중소기업의 14.7%가 산업기밀 유출을 경험했고, 건당 피해금액은 1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직원 스카우트(67%)를 통해 기밀을 빼가지만, 협력업체가 바로 기술을 탈취하는 사례(20.4%)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악의적 행위에 대해서는 발생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죗값으로 치르게 하면, 유사행위 반복을 막을 수 있다는 게 이 법의 취지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영미법계에 퍼져 있는 이 제도가 한국 법체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민사에서는 손해를 본 만큼만 배상하게 하고, 고약한 악의에 대한 징벌은 국가가 형벌로써 내리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사인(私人) 간에 돈으로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없으며, 세 배씩 배상금을 물리는 것은 과잉처벌 금지를 정하고 있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법은 통과했지만 과연 어떤 행위를 기술 탈취로 규정할 지 등에 대한 세부적 논의는 남아 있다. 당연히 진통이 예상되는 상황. 찬성과 반대, 양측이 주장하는 이유를 직접 들어본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 징벌적 손배제 찬성
"기업활동을 위축할 수 있다는 논거로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외국과 우리나라의 법제도의 차이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지난 3월 11일 국회에서 통과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외국과 같이 남소(濫訴ㆍ소용남용)를 조장하거나 기업활동을 위축할 수 있다는 논거로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외국과 우리나라의 법제도의 차이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우선 제조물이나 일반 민사사건에까지 광범위하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인정하는 외국의 입법례와는 달리, 이번에 우리 국회가 통과시킨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도급업체와 수급업체간의 하도급계약 관계에서 발생하는 기술도용 사안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대다수를 차지하는 영세업체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액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 액수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대기업도 임직원들을 상대로 내부교육과 단속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실제로 징벌적 손해배상과 관련된 소송이 발생하는 경우는 염려와는 달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으로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기술이전 및 기술거래의 활성화가 예상된다. 기술에 대한 공정한 하도급계약의 틀이 법적으로 마련되었으므로 정당하게 대가를 지급하고 타사의 기술을 이용하거나, 기술을 적극적으로 매입ㆍ매도하려는 사례가 증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대기업과의 거래관계에서 자사 기술에 대해서 최소한의 법적 보호 장치를 확보하게 되었으므로, 안심하고 경영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 또 필요할 경우 대기업으로부터 로열티를 받고 대기업에 기술을 이전할 수도 있으므로, 발생한 로열티 수입을 재투자해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고용 확대와 수출 증대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풍토는 기술력과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무수한 벤처기업가들을 활발하게 창업 전선으로 뛰어들게 할 촉진제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대기업은 자신의 신규사업에 유용한 기술이라고 판단될 경우, 대가를 지급하고 하도급업체로부터 기술과 특허권을 적극적으로 이전 받을 수 있으므로, 대기업 입장에서도 신규 사업개발에 소요되는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있다. 때마침 최근 정책적 측면에서 기업간의 기술사업화나 기술거래를 활성화하려는 각종 정부지원제도가 쏟아지고 있는데, 이번에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기관 및 기업간의 기술의 활용을 촉진하려는 흐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다만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공정하고 형평성 있게 해석되고 집행되지 못한다면 자칫 사문화(死文化)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는 대기업과 여전히 경제적 약자인 영세중소기업 중간에서 법을 해석하고 집행해야 하는 행정부와 사법부의 형평성 있고 소신 있는 자세가 더욱 요구된다 하겠다.
또한 다종다양한 분야에서 첨단화되어 가는 복잡한 기술적 사건들에 대해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기술지식이 전무한 일반 민사법원의 관할로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다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술도용과 특허침해로 인한 징벌적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 판결의 통일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 소송사건에서 다년간 전문적 경험을 축적해온 특허법원(전문법원)의 전속관할로 하는 제도적 보완책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왕에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그 부작용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제도로 살리는 방향으로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최형준 위즈덤 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 징벌적 손배제 반대
"징벌효과는 형법과 동일하면서도 징벌을 당할 위험성이 형사소송보다 훨씬 커지므로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법절차원칙을 위반한 것 아니냐는 것이 위헌논쟁의 핵심이다. "
'징벌(懲罰)'이란 죄를 지었을 경우 국가가 벌을 주는 것이다. 형법과 형사소송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손해배상'은 계약위반이나 불법행위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을 경우 이를 보상해 주는 것이다. 민법과 민사소송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피해자가 입은 실질적 손해 외에 징벌적 성격의 배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실질은 형법이지만 외형은 민법이므로 형사소송이 아닌 민사소송절차를 통해 부과된다. 공법(형법)과 사법(민법)이 엄격히 분리돼 있는 우리나라 법체계에서 보면 이상한 제도다. 우리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들 중에서 이 제도를 도입한 국가는 거의 없는데도 우리는 하도급법에서 도입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사용하고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논거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와 다른 영미법계 국가라 동일한 기준에서 평가할 수는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미국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위헌적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18세기 사회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규정하는 공법질서가 확립되지 못했던 영미법 국가들에서 형법이 수행해야 할'징벌'을 특정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의 확대로 보완하기 위해 사용됐다. 미국헌법보다 시기적으로도 앞선다. 그러나 공법과 헌법질서가 이미 확립된 현재에는 위헌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가권력을 통제해 국가로부터'징벌'을 당하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미국 수정헌법 제5조와 제14조상의'적법절차 원칙'에 위반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규정에 근거해 국가가 국민을 징벌하기 위해서는 형사소송절차에 따라 가해자의 위법성에 대해'합리적 의심을 넘는 엄격한 입증'을 해야만 한다.
반면 민사소송절차를 거치는 징벌적 손해배상에서는 가해자의 위법성이 의심되는'우세한 증거'를 피해자가 제출하는 것만으로도 징벌을 할 수 있다. 사회적 이익을 위한 징벌효과는 형법과 동일하면서도 징벌을 당할 위험성이 형사소송보다 훨씬 커지므로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법절차원칙을 위반한 것 아니냐는 것이 위헌논쟁의 핵심이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사회적 해악과 불법행위의 사회적 억제라는 정책적 목적을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활용할 경우에는 위헌적 소지가 있다는 취지의 판결(필립모리스 대 윌리엄스, 2007)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는 경우라도 일반 민사사건에서처럼 피해자가'우세한 증거'를 제출하는 것만으로 충분한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형사소송 수준은 아니더라도 민사소송상의 일반적 입증 정도보다는 강화된'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피해자가 제시해야만 헌법상 보장된 가해자의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까지 개별 주(州)의 판단에 맡겨져 있는데 상당수의 주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의도적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해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콜로라도주에서는 아예 형사소송 수준의 엄격한 입증을 요구한다. 이는 징벌적 배상이 기업의 평판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으므로 법적 판단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입법제안자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것처럼 하도급법상의 징벌적 손해배상은 원사업자의 불공정하도급 관행억제와 재발방지라는 사회적 목적에서 도입되었다. 도입방법은 원사업자가 불법행위에 대해 고의·과실이 없음을 스스로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피해자인 수급사업자가 원사업자의 고의·과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민사소송의 일반원칙을 아예 바꿔버린 것이다. 민사소송에서 요구되는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오히려 강화하며 가해자의 헌법상 절차적 권리를 보호하고 있는 미국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적 기준에서 보더라도 도입목적과 도입방법은 우리나라 헌법 제1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적법절차원칙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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