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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78> 갑인예송(甲寅禮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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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78> 갑인예송(甲寅禮訟)

입력
2011.03.2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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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죽은 지 15년 만인 1674년(현종 15년) 2월23일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죽었다. 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복이 다시 문제되었다. 인선왕후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조는 조대비의 상복을 1년복(朞年服)으로 정했다가 9월복(大功服)으로 바꾸었다.

현종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예조가 9월복으로 바꾼 이유를 승정원에 캐물었다. 그리고는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 예조 관원들을 잡아다 취조하라고 했다. 그 다음날 있을 성복(成服)이 복제변경으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예조판서는 병조판서 김만기(金萬基)가 겸임하게 했다가 구전(口傳)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임명했다. 나아가서는 서인의 공격을 받고 충주에 내려가 있는 남인인 허적(許積)을 불러 올려 성복에 참여하게 했다. 성복은 9월복으로 진행되었으며 복제변경 건은 곧 잊혀졌다. 쫓겨났던 조형 등도 다시 기용되었다.

그런데 성복한 지 5개월 뒤인 7월6일에 경상도 대구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조대비의 복제가 잘못되었다고 상소했다. 논지는 다음과 같다. 1)기해복제는 <경국대전> 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이번 복제를 처음에는 1년복으로 했다가 뒤에 9월복을 바꾼 것은 무슨 근거인가? 2)명제(明制)를 버리고 주제(周制)를 따라 9월복으로 바꾼 것은 무슨 까닭인가? 3)현종은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는데도 적장자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경국대전> 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는 장·중자 구별 없이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는데 며느리에 대해서는 장자부(長子婦)를 위해서는 1년복을, 중자부를 위해서는 9월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경국대전> 의 미비점이다. 아들을 위해서는 장·중을 구별하지 않으면서 며느리를 위해서는 구별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신징은 기해복제를 장자복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종은 이 상소문을 7일간이나 가지고 있다가 비변사 제신들에게 공개토론 하도록 했다. 이 때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은 기해복제가 국제(國制)와 고례(古禮)를 함께 참고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송시열(宋時烈)의 체이부정론(體而不正論)을 참작했다는 말이다. 대신들은 9월복을 계속 지지했다.

현종은 김석주에게 9월복을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조사하게 했다. 김석주는 송시열이 효종을 인조의 서자(庶子)라고 해도 괜찮다고 해 허목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현종은 1년복이 맞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 온 지 10일 만에 조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확정했다.

그리고 김수흥 등 서인들을 잡아들여 처벌하고 허적을 영의정으로 하는 남인정권을 출범시켰다. 김석주와 남인들이 서인을 대신해 집권하게 된 것이다. 이를 갑인예송이라 한다. 그러나 이때 남인이 논쟁에 끼어든 것은 아니었다. 현종이 단독으로 1년복을 9월복으로 바꾼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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