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렁뚱땅 넘어가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얘기다. 지난달 16일 사건 발생 이후 경찰 수사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지금도 하는 얘기가 "원점에서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다. 공개된 범인이 있는데도 경찰 수사가 한 달이 넘도록 원점에서 맴돌고 있다면 의지가 없다는 소리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사건 초기 "(국정원이 범인이라면) 국익을 위해 한 일인데. 처벌에 실익이 있겠느냐"고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국회 정보위원회조차 "국익을 위해 어느 것도 말할 수 없다"며 NCND(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로 버티는 국정원 수뇌부를 어쩌지 못했으니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은 미제사건의 수순을 밟는 분위기다. 국익 발언이 먹히는지 이제는 정치권이나 여론도 잠잠하다.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 것인가. 1986년 10월6일 니카라과에서 콘트라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를 실은 미국 민간 화물기가 니카라과 정부군에 격추됐고 화물기의 생존자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고용한 인물로 밝혀졌다. 미 정부가 친(親)이란계 레바논 테러조직에 납치된 미국인 3명을 구하기 위해 적성국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대금으로 콘트라반군을 지원한 이란-콘트라사건의 시발이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CIA가 합작한 이 사건은 인질구출의 명분하에 무기수출통제법과 콘트라반군 지원금지를 규정한 법을 어긴 게 문제였다. 미 의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열어 진상파악에 나섰고 법무부가 임명한 특별검사는 은폐와 증거인멸, 위증으로 덧씌워진 이 사건을 7년 동안 샅샅이 파헤쳤다. 이 바람에 테러단체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달리 뒷거래를 한 이중성이 드러나는 등 미국은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후에 사면되기는 했으나 관련자들이 줄줄이 기소됐으며 윌리엄 케이시 CIA국장은 결국 사임했다. 이게 미국을 유지하는 법치의 모습이다. 명분이나 국가적 체면손상보다 더 큰 국익이라고 본 것이다.
무단 침입과 절도미수에 그친 이번 사건을 NSC, CIA의 비밀공작과 같은 무게로 볼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 특사를 상대로 정보절도에 나선 배경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밟아 행한 공작인지, 그 과정에 월권이나 직권남용은 없었는지, 무슨 위법행위가 더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정부가 지휘계통에 있는 일부 국정원 수뇌부를 바꿀 움직임을 보인다는 보도도 나오는데 인사에서 사건의 본말을 미루어 짐작하라는 의도라면 법치를 우습게 여기는 일이다.
더욱이 엄청난 무례를 당하고도 관대한 인도네시아 정부 자세는 오히려 더 큰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인도네시아는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고 동남아 아세안의 지도국이다. 그만큼 국제적 영향력이 크다. 큰 빚을 진 우리 정부 입장에서 초음속 고등훈련기든, 한국형 전투기 개발이든, 잠수함이든 인도네시아와 협상을 벌이는 각종 사업에서 얼마나 '이익의 균형'에 충실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고 무슨 뒷거래가 있을지 걱정이다. 여러 전례를 보더라도 이러한 부담을 덜고 내외의 국익을 지킬 길은 엄중한 법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경찰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국회가 법치를 세워야 한다.
정진황 사회부 차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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