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의 유령(The Phantom of Inflation)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 2월 미국 뉴욕의 투자은행 RBC의 미국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포셀리가 향후 미국 경제의 가장 큰 위협요소는 인플레이션이라고 강조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요즘 세계 대부분 국가가 국제원자재 및 곡물가격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에 대해 큰 우려를 하지만, 미국은 사정이 비교적 나은 편. 그래서 이런 표현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 주 발표된 미국의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개월 이래 가장 높은 2.1%(전년 동월대비)로 나타나면서 포셀리의 경고를 새롭게 음미하게 된다.
물론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월가의 대다수 금융회사들은 아직까지 미국내 물가상승 압력이 크지 않다고 믿는 것 같다. 그 주요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경제의 잠재 공급능력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상황이 좋아지면 기업과 가계는 미뤄 두었던 자본재나 소비재 구입을 늘리게 되는데 이때 공급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물가가 오르게 된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경기가 점차 회복되면서 전반적인 수요가 늘어나고 있지만 경제내의 잠재 공급능력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물가상승 압력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원유 등의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이것이 미국 내 일반물가 상승으로 전이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 소비자들이 가격상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 생산자가 비용 증가분을 소비자에게 곧바로 전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 최근 원자재와 곡물가격 급등은 중동지역 불안 등 지정학적 요인과 이상기후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데에 무게를 두고 있다.
셋째, 소비자의 기대 인플레이션이 아직까지 3% 내외에서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래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높으면 실제로 물가가 오르기 전에 소비자가 미리 물품을 구매하려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에 물가 오름세가 당초 예상보다 더 빨리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들을 근거로 연준은 15일 열린 통화정책결정회의(FOMC)에서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 움직임은 일시적 현상이며, 중장기적 인플레이션 압력은 크지 않다’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우려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앞선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첫째, 현재 미국의 잠재 공급능력이 생각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충격의 골이 워낙 깊어 잠재 생산능력 자체가 크게 축소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장기 실업상태의 구직자 비율이 과거 경기침체기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을 뿐만 아니라 제조업 가동률도 과거 평균수준을 지속적으로 밑돌고 있다. 이는 기존 노동력의 질이나 생산설비의 효율이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둘째, 국제원자재 가격 등의 비용 상승이 소비재 가격으로 전가되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일부 제조업부문에서 조만간 소비자가격을 올릴 의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원자재 및 곡물가격은 중국, 인도 등 인구대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수요증가에 견인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추세적인 상승이 불가피하고 이는 지속적으로 비용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도 또다른 이유다.
이외에도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Fed의 통화정책도 문제 삼는다. Fed는 미국의 높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경기부양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문제는 이를 위해 정책 금리를 거의 제로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금융권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렇게 풀린 자금이 상황변화에 따라 언제든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논란들은 미국 경기가 그동안의 우려와 달리 견실하게 회복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이제 시장 관심이 인플레이션 가능성 여부로 옮겨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앞으로는 소비자의 인플레이션 기대가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 같다. 향후 몇 개월 동안의 소비자물가 오름폭에 따라 경기회복, 원자재가격 상승 등과 맞물려 인플레이션 기대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 ‘경제는 심리다’라는 격언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미국이 여전히 인플레이션 안전지대로 남을 수 있을 지 그리고 물가안정을 책임지고 있는 Fed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신현열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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