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권력/박종성 지음/서울대출판문화원 발행ㆍ448쪽ㆍ2만8,000원
태초에 옷은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맹수나 겁탈자의 시선, 또 추위로부터 숨으려 인간은 피륙을 만들고 짐승의 가죽을 벗겼다. 사회를 이루고 위계질서가 생겨난 뒤에는 옷이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변신했다. 강자는 자신이 약자와 차별됨을 옷으로 표현했다.
여기까진 누구나 아는 얘기. 이 책은 전근대적 권위가 해체되고 인간의 미의식이 산업과 결합한 뒤에도 옷, 혹은 패션이 권력과 정치의 기호로 기능하고 있음을 변증해 보인다. 나아가 권력의 표현태가 아니라 권력의 본질로서 패션의 정체에 접근한다.
저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학자다. 그리고 무척 다양한 관심사를 사회과학의 방법론과 결합시켜 부지런히 책을 쓰는 저술가다. 조선왕조의 기반을 이룬 사상, 영화, 포르노, 문학, 매춘, 성인만화 등등이 정치학과 만나는 접면을 포착해 매년 한두 권의 책으로 묶어 내고 있다. 스물세 번째 책인 <패션과 권력> 은 그가 중세 유럽의 문장(紋章)부터 현대의 빈티지풍 밀리터리룩에 이르기까지의 패션 변천사에서 권력의 메커니즘을 읽어낸 작업이다. 패션과>
패션은 육체를 감싸는 단순한 기호나 만만한 상징이 아니다. "자본이고 기술이며 유혹이자 신화이되 이윤을 넘어서는 대리만족 도구로 세상 곳곳에 튼실하게 뿌리내렸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저자는 패션을 통한 시지각의 순응과 보편화 과정에 지배와 복종의 정치적 네트워크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패션이 이내 그 자체로 권력이 되고 끝내 권위의 아우라마저 내뿜는 역사의 힘이 되어 가는 과정에 눈길을 고정하려 한다"고 저술 목적을 밝힌다.
서장에 이어지는 본론은 "복종의 확산, 권위의 압축"으로 표현되는 중세 문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저자는 유럽과 일본의 왕실, 귀족들이 사용한 화려한 문장에서 패션이 지닌 중세적 의미를 고발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불공정과 독선을 무마하고 대신 이를 향기와 장식으로 치장하고 싶었던 또 다른 욕망의 수단"으로 요약된다. 저자는 "추함을 덜어 내기 위해 분장이 필요했고, 악마성을 은폐하기 위해 때로 신을 불러내야 했으며, 비신사적 행태를 무마하기 위해 신사복이 요긴했던" 시절을 문장의 시대를 규정한다.
권력의 이기적 속성을 보다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목에 둘러 머리를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해 주는 러프(ruff)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 상류층의 필수품인 러프는 장식적 효과 못지않게 착용시의 번거로움도 만만치 않았다. 노동의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계층은 결코 넘볼 수 없는 패션 아이템이다. 저자는 "착용의 버거움을 이겨내야 하는 당사자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더한 중량감이 담길 때, 그 기이한 가분수의 패션 정치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얘기한다.
혁명이 일어나고 시민 권력이 대두하면서 패션이 권위의 표징이었던 세월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역전이 일어난다. 패션이 역사의 변화를 추동하게 된 것. 저자는 기성복의 등장을 "혁명 속의 혁명"이라고 규정한다. 값싸고 편리하며 대량 보급과 소비가 가능한 기성복의 혁명성은 남녀의 성차를 패션을 통해 녹여 없앤 결과를 낳았다. 반면 패션은 현대에도 여전한 전근대의 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슬람 문화권의 베일에서 반동적 정치 도구로서의 패션을 읽어 낸다. 그러나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일방적 순종이 아니라 "쓰고 노려보거나, 휘감은 채 대드는" 여성들의 감춰진 표정이다.
미니스커트와 장발에 이어 저자의 이야기는 빈티지 패션에서 마무리된다. 저자는 구김과 낡음을 아름다움으로 해석하는 빈티지 코드에서 정치적 전복성을 추출한다. 물론 빈티지에 깃든 도발과 기발함을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 언젠가는 유행의 덧없음과 일회적 열광에 치우쳐 잊히거나 응용적 순환대열에 합류할는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세기말의 불안과 미래를 향한 사회적 혁명의 가시적 표현도구로서, 또는 사회 불안을 뛰어넘을 자위 수단으로서 빈티지 권력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진지하다.
이 책에 따르면 패션이 무시하지 못할 사회적 권력이 된 현상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패션은 더 이상 삶의 물리적 도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패션은 계층의 징표를 뛰어넘는 권력으로 엄존하면서 자신의 주관과 의식을 드러내는 정치 수단으로 작동한다.
저자는 "정치와 인간의 관계를 역사 속에서 새롭게 이어 줄 핵심 코드는 패션"이라며 이렇게 인식의 변화를 제안한다. "고상하고 거창하게 믿었던 그것들 모두가 자잘한 역사의 파편과 숱한 일상의 기억들로 재구성된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지자. 인간이 인간을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을 감싼 무언가가 사람을 홀렸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을 바꿔 보자."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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