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친손녀 안연호씨(74)가 지난달 미국에서 별세했다고 전한다. 반면 안 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외고손자 마쓰모토 다케아키(松本剛明ㆍ51)가 9일 일본 외무대신에 임명됐다는 소식이다. 두 집안의 엇갈린 운명에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지 101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4분에 일제는 안 의사에 대해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에 앞서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에게 사람을 죽였으니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뜻을 전했다. 안 의사는 25일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으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하다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홍범도(洪範圖)ㆍ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청산리 전투가 항일독립전쟁 최대의 승첩이라면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쾌거였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은 안 의사가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한 곳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플랫폼에 울려 퍼진 총성 네 발은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대한국인’의 용장(勇壯)한 기개를 한껏 떨친 장쾌한 의거였다.
안 의사는 1909년 이전부터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싸우다가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민족의 원수, 동양 평화의 적 이토를 몸소 처단하고자 결심했다. 안 의사는 그 해 10월 21일 동지 우덕순 유동하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하얼빈에 도착해 그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10월 26일 오전 9시30분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와 멎고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한 뒤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권총을 뽑아 들고 뛰쳐나간 안 의사는 이토에게 총탄 네 발을 연발했다. 첫 발은 이토의 앞가슴에, 제2탄은 옆가슴에, 제3탄은 배를 관통했다. 의거가 성공하자 안중근 의사는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치고 태연하게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하얼빈역에서 300m쯤 떨어진 만주 둥칭(東淸)철도국 사무실로 끌려간 안 의사는 “나는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장을 총살, 응징했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러시아군에서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진 안 의사는 그 뒤 200여 일 동안 뤼순 감옥에서 고초를 당하다가 이듬해 3월 26일 조국을 위해 귀중한 한 목숨을 바쳤으니 나이 31세였다.
한스럽고 통탄스러운 사실은 안 의사가 순국한 지 올해로 100년이 넘었건만 아직까지 무덤과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못난 후손들은 참으로 안 의사를 비롯한 선열들께 면목이 없다. 아직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본이 매장지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으며 관련 자료도 모두 소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하얼빈 영사가 ‘안중근의 유해를 절대로 가족에게 인도하지 말라’고 관둥 도독부에 보낸 전문이 최근 발굴되기도 했다. 또 중국이 안 의사의 매장지에 아파트를 지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해마다 안 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만 되면 기념관을 새로 크게 짓느니 세미나를 여느니 하는 것보다 안 의사의 거룩한 순국정신을 제대로 되새겨보는 것이 좋겠다. 지금 우리는 또 다시 국가적으로 난국을 맞았다. 국난 극복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안 의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황원갑 소설가ㆍ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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