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의 책 한 권이 서울의 종이값을 올리고 있다."
지난 22일 출간돼 유례없는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신정아씨의 자전에세이 <4001>을 두고 항간에 도는 말이다. 이틀 만에 1쇄 5만부가 모두 팔려나갔고 추가 인쇄될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들은 출판사에, 사람들은 서점에 줄을 섰다. "출판계에서 통상적인 경우는 아니다"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씨의 책에 이토록 열광케 하는 것일까.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는 "선정성과 정치성이라는 두 요소가 상승작용을 일으킨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집계에 따르면 출간 후 이틀 동안 신씨의 책을 가장 많이 구입한 층은 50대 남성(17.4%)이었는데, 이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두 분야에 큰 관심을 보이는 층"이라며 "여기에 민감한 세대의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30대 여성(16.3%)도 높은 구매력을 보였다"며 "이는 신씨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흔히 보이는 애증의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신씨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도 같은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동병상련의 정도 함께 느낀다는 것이다.
책의 인기 비결을 설명하는 데는 관음에 대한 독자들의 욕구도 빠지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신과 전문의는 "과거 연예인 X파일이 폭발적이었던 것은 결국 실명이 나왔기 때문"이라며 "이번의 경우에도 정운찬 전 총리 등 다수의 권력층, 지도층 인사들의 실명이 거론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책의 서술 방식도 '차 안에서 추행 당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웃옷 단추를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매우 구체적"이라며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한국 사회에 정의 열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과도 연결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택광 교수는 "일방적인 주장이라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신씨의 책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본다면 이는 그 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된다"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기를 끄는 책들은 대개 부조리와 정의에 관한 이야기인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정의란>
신씨의 '용기 있는 행동'도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로 분석됐다. 문학평론가 김갑수씨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신정아씨의 입장에 대입한다면 많은 경우 소리없이 지내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기를 바랄 것"이라며 "하지만 신씨는 여성을 업무상의 파트너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보는 남근주의 사회의 병폐를 온몸으로 겪은 한 여성으로서 이를 세상에 고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복수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분석인 셈이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신씨의 복수극이 책의 인기 배경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택광 교수는 "책 제목으로 자신의 수감번호를 선택한 것은 '당신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신씨는 과거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쓰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지만, 실제로는 복수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신분석학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다"며 "신씨는 책을 통해 '난 죄수가 아니다, 피해자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책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일방통행식의 폭로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도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정신과 전문의 이창한씨는 "신씨는 자신의 책을 통해 세상의 한복판에 보란 듯이 다시 섰다"며 "터뜨리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인생역전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갑수씨는 "'좋은 게 좋다'며 나쁜 것들은 감춰놓고 보는 우리 사회가 보다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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