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주민 일자리 제공가구공장서 작업 도중 사고로 손가락 3개 잃어실의 속에 직업학교 들어가 포스코가 만든 송도에스이 취업건네는 말 한마디부터 따뜻… 설땐 향수 달래는 관광 지원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멀리 오셨네요."
밝아 보였다. 체제가 다른 이주민으로 살아가기가 낯설 법도 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어색함을 찾기 어려웠다.
23일 인천 송도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장하나(46ㆍ가명)씨는 억양만 조금 달랐을 뿐, 마음씨 좋은 여느 이웃집 아주머니와 같았다.
그는 함경남도 출신으로, 북한이탈주민(새터민)이다. 그는 이질적인 문화와 다른 관습 등으로 국내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새터민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수 십 번이나 자살을 떠올렸을 만큼, 그의 한국 정착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공장서 일하던 중 세 손가락 잃어
그가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들어온 때는 2008년 1월. 정부 지원과 함께 송도에 둥지를 튼 그는 꿈에 부풀었다."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북쪽에선 노력해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거든요. 남쪽으로 내려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 곳에선 무슨 일이든 노력만 하면 가능하다고 들었거든요."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먼저 일자리를 구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막노동부터 식당 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안정적이지 못했다. 색안경을 끼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사실, 대부분의 고용주들이 저에게 딱히 호의적으로 대해 주진 않았어요. 그래도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습니다." 그는 땀을 흘린 만큼의 대가가 돌아온다는 당연한 사실에 마냥 즐거웠다. 일을 하면서 브로커에게 남한으로의 이주를 도와준 비용(1,200만원)을 갚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얄궂은 그의 운명은 작은 기쁨마저 불과 10개월 만에 빼앗았다. 가구공장에서 일을 하던 도중,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오른손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 그는 이 사고로 소중한 손가락을 3개나 잃었다. "앞이 캄캄했어요.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내려왔는데 손가락을 못쓰게 만들었으니,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뜩이나 이탈주민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는데…. 모두 포기했습니다. 솔직히 죽고 싶었거든요."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사고 여파는 컸다. 수 없이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7살배기 아들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한국에 먼저 내려가 정착한 다음, 중국에 머물고 있는 남편과 아들을 데려오기로 했던 작은 그의 꿈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남편이 사고 발생 3개월 만에 부랴부랴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생활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한국말이 서툰 중국인 남편의 국내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던 데다, 기초생활수급자 명목으로 지원되는 월 90만원을 갖고 생활비와 1,000만원이 넘는 브로커 이주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악몽 같은 시련은 그렇게 약 1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절망 속에 찾은 사회적 기업
그에게 인생 탈출구가 찾아온 것은 2009년9월, 우연히 전액 국비로 운영되는 국제직업전문학교 모집공고를 접하면서였다. "비정상적인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어요. 이 곳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뭔가 배워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배움을 쫓아갔던 이 곳에서 그의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학교에 들어간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송도에스이에서 새터민들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희소식이 날아든 것. (그는 이 학교에서 파워포인트와 엑셀 등 컴퓨터(PC) 활용능력 자격증을 획득했다.) 송도에스이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안정된 일자리 지원을 목적으로 지난해 4월 포스코의 100% 지원으로 설립된 자립형 사회적 기업이다.
"입사 지원은 했지만, 처음엔 반신반의 했어요. 아직까지도 새터민들에 대한 편견이 있고, 제 손도 불편했기 때문에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 보자는 뜻에서 송도에스이에 지원했던 그의 생각이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따뜻했어요. 새터민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수근대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일을 해봤지만, 이렇게 스트레스가 없는 곳은 처음입니다." 기쁜 마음을 표현이라도 하듯, 그는 가방에서 한 움큼의 사탕을 꺼내 건넸다.
특히 회사 통근버스의 무료 운영이나 전문강사를 초빙한 웃음특강 개최 등 특별 프로그램 진행은 새터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지난 설에는 회사가 전액 비용을 부담해 스파 관광까지 마련, 고향에 못 가는 이들의 마음?달래주기도 했다. 안정적인 회사 생활과 함께 그의 가정 생활도 평온을 찾아갔다. 한국 생활 적응에 애를 먹었던 그의 남편도 공단 근로자로 취업했다.
단란한 가족들과 함께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는 요즘 또 다른 계획을 짜고 있다. "늘 배우지 못한 게 한 이었어요. 기회가 된다면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 학사모를 써보고 싶어요. 그래서 저와 같은 새터민들이 올바르게 정착할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의 상기된 얼굴에선 강한 삶의 의지가 느껴졌다.
송도=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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