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 대명사이자 세기의 연인이 떠났다. 23일 숨진 은막의 여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50~1960년대 할리우드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20세기의 대표적인 스타다. 그의 이름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고 할리우드의 아이콘이었다.
테일러는 193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을 오가는 부유한 미술상이었고 어머니는 전직 배우였다. 그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로스몬드 테일러다.
테일러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해 가족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면서 삶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9세 때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유니버설과 영화 출연 계약을 맺으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그는 특이하게 이중 속눈썹을 지녀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검은 머리와 둥글둥글한 얼굴, 동그란 코 등 동양적인 아름다움과 서구적인 미가 결합된 외모도 영화계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배우 초년병 시절 ‘래시 집에 돌아오다’(1943)와 ‘제인 에어’(1944)에 출연하였으나 명성을 얻지 못했다. 1944년 ‘녹원의 천사’에서 유명 경마대회 우승을 위해 총력을 다하는 소녀 역할을 연기하며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녹원의 천사’는 그의 출세작이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촬영 중 낙마로 인한 후유증에 평생을 시달려야만 했다.
이후 테일러의 거침 없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1950년 ‘신부의 아버지’로 첫 성인 역할을 해냈고, 1951년 ‘젊은이의 양지’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1950년대 ‘레인트리 카운티’(1957)와 ‘뜨거운 양철 지붕 위 고양이’(1958), ‘지난 여름 갑자기’(1959)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연달아 올랐다. 그러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1956년 세기의 미남 록 허드슨과 제임스 딘이 함께 한 영화 ‘자이언트’에 출연, 정상급 여배우로서의 위상을 다졌다. 1960년엔 인생의 연인 리처드 버튼과 연기 앙상블을 이룬 ‘클레오파트라’로 여배우로서 최초로 출연료 100만달러를 돌파했다.
1960년대는 그에게 상복이 터진 시대였다. 1961년 ‘버터필드8’(1960)로 첫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1967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로 두 번째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위험한 여로’(1967)와 ‘말괄량이 길들이기’(1967) 등 화제작 출연이 이어졌다.
마흔을 넘으면서 테일러의 영화 이력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영화보다 잦은 결혼과 이혼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30번이 넘는 수술과 잦은 병치레, 다이어트 중독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만년에 그는 에이즈 환자의 인권 보호 운동에 앞장서 화제를 모았고,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의 굳은 우정으로도 이목을 끌었다. 그는 1993년 아카데미상 평생공로상도 받았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