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째 예멘을 통치하고 있는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이 퇴진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고민이 다시 커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사퇴, 바레인의 반정부 시위 격화 등으로 중동의 동맹국들이 흔들리는 와중에 또다시 미국이 공을 들였던 예멘 정부마저 와해될 지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예멘은 이집트나 바레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 테러전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미국이 느끼는 상실감은 더욱 크다.
예멘은 미국의 공세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 쫓겨온 테러조직 알 카에다가 새로운 거점을 형성하면서 대테러전 1번지로 부상한 곳이다. 알 카에다는 2009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 지부를 통합, 아라비아반도지부(AQAP)를 세운 뒤 그해 성탄절 미국 여객기 테러기도 사건, 지난해 10월 예멘발 미국행 소포폭탄 사건 등 굵직굵직한 테러를 저질러왔다. 예멘은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가문의 고향이기도 하다. 미국이 다른 중동국가들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면서도 예멘의 시위에 대해서는 논평을 내지 않는 것은 이런 속사정이 있어서다. 러시아를 방문중인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22일(현지시간) 살레 정부 지지 여부에 대해 “예멘 내정에 관한 문제”라며 언급을 피했다.
미국이 예멘의 불안정을 심각하게 여기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살레 대통령 이후 마땅한 대체세력이 없다. 시위를 주도해온 유력정당 중 하나인 ‘이슬라’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압델-마지드 알 진다니는 미국의 테러범 명단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다른 야권 지도자인 셰이크 하미드 알 아흐마르는 알 카에다는 정권의 ‘조작극’이라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실업, 빈곤, 정치적 분열 등이 극심해 차기 정권이 테러전에만 전념할 수 없다는 것도 미국의 우려를 더한다. 미 언론들은 “예멘 사태는 파키스탄의 빈 라덴보다 미 안보에 더 큰 위협”이라고 일제히 우려의 논조를 쏟아내고 있다.
이스라엘과 최초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중동의 교두보’ 인 이집트의 친미정권을 잃은 미국은 한창 시위가 격화하는 바레인 사태에 대해서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다. 인접국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가 시위대 진압을 위해 국경을 넘어 군대를 파병하는데도 “냉정을 촉구한다”는 미지근한 논평을 내는데 그쳤다. 이런 배경에는 바레인이 해군 5함대와 패트리어트 미사일 기지가 주둔 중인 미국의 핵심 전략지역이라는 점, 수니파 정권이지만 국민 대다수는 시아파여서 정권이 무너질 경우 시아파 국가인 이란에서와 같이 반미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황유석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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