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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진짜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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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진짜 양반

입력
2011.03.23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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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명말ㆍ청초의 대학자 고염무(顧炎武)가 당대 중국 지배층을 비판한 글 생원론(生員論)에 빗대어 조선 양반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다산의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염무가 온 천하 사람이 모두 생원이 될까 걱정하였다지만 나는 조선사람 모두가 양반이 될까 걱정한다. 조선 양반의 폐단은 더욱 심하다. 생원은 과거에 합격한 이후라야 생원 명칭을 얻는다. 그러나 양반은 문과나 무과에 합격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 허명만을 차고 있다. 또한 생원은 정해진 수가 있지만 양반은 무한정이다. 생원은 세상 변화에 따라 변천하지만, 양반은 한번 칭호를 얻으면 백세토록 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한 가지 바라는 바가 있으니, 이 나라 전체가 양반이 되는 것이다. 모두 양반이 되면 결국 양반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있기에 나이든 자가 드러나는 것이요, 천한 자가 있기에 귀한 자도 나타나는 법이다. 만일 모두가 존귀하게 될라치면 아무도 존귀한 자가 없게 된다. 관자(管子)가 말하였다.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존귀해지면 되는 일이 없으며 나라에 결코 이롭지 않다.”

다산의 진의는 무엇인가. 정말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되기를 바란 것일까. 다산의 주장에는 역설의 진리가 숨어있다. 조선의 양반들이 양반답지 않으니 차라리 모두가 양반이 된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이다. 양반답지 않은 사람들이 양반 행세를 하는 현실을 비판했다고 해서 그가 양반사회 자체를 부정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다산은 진짜 양반들의 세상을 원한 것이다. 사이비 양반들, 겉으로는 양반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양심도 없고 사회적 책무도 다하지 않는 가짜들의 세상이 아니라, 진짜 양반이라면 갖추어야 할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감을 지닌 진정한 군자들의 세상을 기대한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생각 이면에는 주자학에 대한 비판 정신이 깔려 있었다. 주자학자들은 모든 사람은 타고난 선한 본성으로 인해 양반과 천민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조선 후기에 더욱 강화되어 사족들에게만 요구하던 도덕성과 양심의 회복을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였다. 많은 도덕 교화서가 한글로 번역되었고, 일반민들도 이를 읽고 인륜을 회복하기 바랐다.

모든 백성들이 도덕성을 회복한다면, 주자학자들이 바라는 이상사회 그 자체이다. 다산은 이를 매우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특히 스스로 양심적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이비 양반의 등장을 우려했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은 돌아보지 않은 채 타인의 불효와 부도덕을 비난하는데 열중했다. 자신을 수양하기보다는 타인의 부도덕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그 뒤에 숨겼던 것이다. 도덕의 과잉이 야기한 가짜 양반의 대두를 짐작하게 한다.

몇몇 조선후기의 사료는 당시 양반수가 급격히 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사회경제적으로 양반이 될 만한 계층이 성장했다기보다는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음을 의미한다. 소농일지라도 도덕적이라고 판단하면 양반으로 자처했다. 이에 다산은 세상사람 모두가 양반 행세를 할 경우 진정 나라가 어지러워질 거라고 걱정했다.

모두가 양반이라고 항변하지만, 아무나 양반이 될 수는 없다. 다산에게 진짜 양반이란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사회적 책무를 통렬히 느끼는 자에 국한되었다. 양반은 많아지는데 진짜는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현상, 다산만의 걱정은 아닌 듯하다.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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