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가수 7명이 노래 대결을 한다. 500명의 청중 평가단이 현장에서 점수를 매긴다. 최하위 가수 1인은 탈락하고 그 자리를 다른 가수가 메운다. 지난 일요일에 3회째 방송이 나간 프로그램 의 포맷이 이렇다. 최근 케이블과 공중파에서 큰 인기를 모은 신인가수 선발 프로그램의 체제를 기성 가수들에게 엇비슷하게 적용한 셈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서바이벌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양질의 공연을 유도해 세대를 초월하는 음악 본연의 감동을 선사하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라고 했다.
며칠 전 글 쓰는 선배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경쟁 논리가 예술까지 갉아먹는다며 서바이벌 포맷을 불편해 하는 분이 있었다. 예술은 본래 절박한 것인데 오랜만에 절박해진 가수들의 노래가 큰 감동을 주더라며 흡족해 하는 분도 있었다. 자신에게 예술의 감동은 무대를 유유자적 즐기는 명인들을 볼 때의 편안함에 가깝다며 이 프로그램의 과도한 긴장감을 힘겨워 하는 분도 있었다. 셋 다 일리가 있었다. 애매한 기분으로 방송을 기다렸다. 경쟁은 불편했지만 결과는 궁금했다.
방송이 끝나기 10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시청소감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결말이 남긴 여운은 적잖이 심각했다. 못 본 분들을 위해 정리한다. 경연이 끝나고 발표된 첫 탈락자는, 예상을 뒤엎고 혹은 예상대로, 참가자 중 최고참인 김건모 씨였다. 후배 가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와중에 재도전 시스템 도입이 제안되었고, 탈락자는 거기에 응했으며, 이 과정은 신속히 정당화되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시청자들을 당혹스럽게 한 부분은 최소 세 가지 이상인 듯 보인다.
첫째는 약속 파기 그 자체다. 옳건 그르건 '서바이벌'은 애초의 약속이었다. 원칙 파기가 비일비재한 한국사회를 견디고 있는 우리에게 그 즉흥적인 결정은 배신감을 느낄 만한 것이었다. 둘째는 약속 파기의 논리다. 선배 가수에 대한 예우로 보이는 그 논리는 위계와 특권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한국사회의 반영처럼 보일 소지가 없지 않았다. 셋째는 약속 파기 후의 변론이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약속의 파기가 꼭 약속의 대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님을 설득했는데, 뒤통수 맞고 설교까지 듣는 것이 유쾌할 수는 없다.
경쟁 논리를 조장한다는 비판과 대중음악계 내부의 반발이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이해는 하되 그럼에도 제작진의 결단을 지지하기는 어렵다. 프로그램의 성격상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만찮은 심리학적 에너지를 투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투자가 무의미해졌다는 허망함 때문이기도 하고, 또 특정인의 탈락이라는 결과를 나름의 방식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은 시청자의 몫일 텐데 그 몫까지 제작진이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 프로그램이 드물게도 좋은 '텍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해버렸다는 점이다. 다양한 해석 가능성에 열려 있어서 생산적인 질문을 낳는 것이 텍스트다. 이미 일정한 경지에 오른 예술적 기량들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미학적 질문,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왜 자꾸 생기는가 하는 사회학적 질문, 냉혹한 경쟁을 지켜볼 때 느끼는 불편함과 짜릿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심리학적 질문 등을 던지는 일이 이제는 머쓱해졌다. 이제는 음악만이라도 잘 지켜주길 바랄 뿐.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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