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의 떡 강탈 장면을 목격하면서 전쟁에 대해 만감이 교차했다. 본능과 생존, 그것을 위해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 질 수 있는가 하는 회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인간의 존엄성은 과연 무엇일까·….
훗날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2002)를 보다가 문득 내가 겪은 당시의 일과 영화 속 '카라멜 성찬식 장면'이 부딪치며 영화 속 몽타주(여러 화면을 이어 붙여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영화 기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를 배경으로 나치 군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절망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이 영화는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치열한 생존과 그 끝에서 겨우 버텨냈던 끈질긴 예술혼을 병치시킨다. 짐승처럼 죽어갔고, 짐승처럼 인간을 죽이던 홀로코스트의 잔혹함과 쇼팽의 야상곡이 흘러나오는 몽환적 현실의 충돌. 전쟁의 광기와 극단적 공포,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과 유대인이 함께 느끼는 피아노 선율의 아름다움이 빚어내는 아이러니….
주인공 스필만과 그의 가족은 처형 기차에 오르기 직전, 있는 돈을 모두 모아 카라멜 한 개를 산다. 면도칼에 잘린 작은 카라멜은 부스러기처럼 초라하게 조각나지만 카라멜 성찬식은 성스러운 최후의 만찬답게 숙연하기만 하다.
이 카라멜 성찬식과 떡을 강탈하던 국민방위군의 굶주린 모습은 내 마음속에 평행편집(서로 다른 두 장면을 엇갈리게 보여 주는 영화 편집기법)되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 그리고 그 와중에도 살아남는 예술혼과 인간됨의 정체성, 전쟁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는 인간의 본능 등을 화두로 던졌다. 전쟁 중에 피아니스트라는 존재감으로 구사일생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나약해 보이기만 하는 스필만은 예술 속에서 누구보다 강인했다. 내가 겪어 낸 전화(戰火) 속 영화도 그러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 중 영화를 한다는 것이 일견 나약한 예술인의 현실도피적인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난 영화를 통해서, 그리고 영화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현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중공군에 쫓기며 남하하다 3일 만에 구사일생으로 대구로 돌아왔다. 원대 복귀한 대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편지는 동생의 전사통지서였다. 불운하게도 본의 아니게 북한의용군이 되었다가 다시 국군이 되면서 군복을 두 번 바꿔 입었던 두 살 아래 동생. 결국 제 명에 살지도 못하고 전사를 한 기막힌 현실에 가슴이 터지는데, 전사통지서는 단지 '강원도 무명산 전투에서 전사를 했다'라는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그렇게 전사한 동생을 안장하기 위해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을 쫓아다녔지만 시신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손 닿는 모든 곳을 수소문했고 세월이 흘러 컴퓨터 조회도 했지만 시신을 찾지 못하다가 50년만인 몇 년 전에야 동생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는 것을 알았다. 처남이 컴퓨터의 첨단 검색도구를 활용해 찾아낸 동생의 동명인이 여섯 사람이었다. 그 중 한 명의 주소가 '중구 초동 105번지'였다. 폭격에 전소되고 말았던 우리 집 주소였다. 소식을 듣고 가슴이 메여 왔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동생 전사 소식에 망연자실하던 차에 부모님이 부산 다대포에서 조난을 당하셨다는 비보를 어처구니없게도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남의 일 같이 별생각 없이 보던 배 조난사건 기사 속 사망자 명단에 부모님 성함이 있었다. 기가 막혔다.
당시 다대포에 육군병참학교가 있었는데 그 곳 교장이 내 맨 위 여동생의 남편, 내겐 매제 되는 분이었다. 아버님은 부산에 사업체를 옮겨놓고 어머님과 사위 보러 간다고 배를 타고 갔다가 조난을 당한 것이었다.
시신도 못 찾고 집에 남아있는 누이동생들에게 가봐야 했다. 황망히 집에 돌아가 보니 졸지에 고아가 된 여덟 살, 여섯 살 누이동생들이 험한 전쟁터에서 굶주리며 내동댕이처져 있었다. 내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정훈국 촬영대장 윤봉의 소령에게 "집안이 이런 꼴이 되었으니 난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고, 내 딱한 사정이 반영돼 1년 반 정도의 군 생활을 접게 됐다.
제대 후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하루 한 끼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옷은 단벌이라 밤에 빨아 말려서 아침에 입었다. 피난처 생활이 모두 다 그랬지만 견디기 쉽지 않은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영도 쪽에서 아버님 시신이 떠올랐다는 연락이 왔다. 찾아가 보니 누군가 떠다니는 아버님 시신을 건져서 안치를 해놓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버님을 절에다가 모실 수 있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만 어머님 시신은 그 후 지금까지도 못 찾고 있으니 그 생각만 하면 늘 뜨거운 돌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마냥 먹먹하다.
얼마 뒤 아버님 회사에서 회사를 정리한다는 연락이 왔다. 변호사가 "회사 정리 뒤 남은 상속금이 있다"고 했고, 나는 그렇게 선친이 남긴 재산을 상속 받게 됐다. 그 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굶다시피 살 때였다. 상속금으로 생활에 숨통이 트였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동생들을 부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속금으로 궁핍한 생활을 면하고 그냥 어떻게 좀 살았어야 했는데 제정신이 아닌 열혈 영화청년은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청산할 생각은 않고 다시 영화 만들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전쟁 전과 전쟁의 와중에도 영화를 하던 사람이니 '데뷔작품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고생스런 피난 와중에 어쩌자고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도 영화를 제작할 염을 못 내던 전시에 '최후의 유혹'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영화인들 중에 겨우 살아서 부산에 피난 나온 사람들은 그날그날 살아가기가 버겁기만 했다. 부산은 먹고 생존하기조차 힘든 고단한 피난터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영화를 제작하겠다 하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이었다. "이 피난 와중에 무슨 영화를 제작한다고 그러느냐." 가까운 지인들이 극구 만류했다. 윤일봉과 조항, 이민자, 이택균, 구종석 등 당시 피난 온 배우들 모두 입을 모아 나를 걱정해줬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 스필만이 피아노 연주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견뎌내었다면 나는 영화 제작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을 살아내고자 했던 것 같다. 극단적인 절망이 만들어낸 아이러니라 하겠다. 어쨌든 난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차근차근 '최후의 유혹' 제작을 진행시켜 나갔다.
어느 날 윤일봉이 엉클어진 장발에다 유난히도 남루한 복장의 한 청년을 데리고 왔다. "누구야? 이 젊은이?"라고 물었더니 동국대 재학 중에 '해풍'이라는 단편 실험영화에 출연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 영화에 윤일봉이 후시녹음을 해 준 인연으로 내게 그 청년을 데려 온 것이었다. "저는 유현목입니다. 국민방위군에 끌려갔다가 부정사건으로 방위사령관은 총살되고 방위군은 해산되어 이제 오갈 데도 없는데 마침 영도다리에서 윤일봉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국민방위군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굶주리며 고생했는지 목격했던 터라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했던 이 청년을 외면 할 수 없었다. 윤일봉의 부탁도 있고 또 마침 옆에서 일을 거들어 줄 사람도 필요했다. "그러면 내가 책(시나리오)을 쓰는데 같이 좀 옆에서 받아쓰고 정리도 해라."
리얼리즘 영화와 문예영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발탄'(1961)의 유현목 감독은 이런 나와의 각별한 인연을 통해 영화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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