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는 1969년 카다피의 쿠데타 전까지 2차 대전 격전지로 유명했다. 롬멜의 독일 전차군단과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광대한 리비아 사막과 트리폴리 벵가지 토브룩 등 전략 요충에서 벌인 전차전은 전쟁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리비아는 추축국 이탈리아의 식민지였고,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등 주변국은 연합국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였다.
이 북아프리카 전쟁은 연합군이 승리, 리비아는 1943년부터 1951년 독립 때까지 영국 프랑스가 분할 점령했다. 지금의 수도 트리폴리를 비롯한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와 제2도시 벵가지 등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은 영국, 남서부 페잔 지역은 프랑스가 나눠 통치했다.
아랍 혁명의 순수성 사라져
세 지역은 뿌리와 전통이 다르다. 트리폴리타니아는 고대 페니키아가 지배했고, 키레나이카는 그리스가 경략했다. 이어 로마제국과 아랍, 스페인, 오스만터키, 이탈리아가 차례로 통치했다. 이런 역사와 한반도 8배 크기 땅 덩이의 90%가 사막인 지리적 조건은 민족국가와 정체성 형성을 가로 막아 지역과 부족 중심 전통이 여태 남았다.
인구 700만에 불과한 리비아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을 잇는 지중해 연안 길이가 1,000km가 넘어 예부터 교역과 전략적 가치가 크다. 연합국이 리비아를 독립시키면서 친서방 이드리스 국왕을 세우고 군사기지를 유지한 배경이다. 1959년 석유 발견으로 그 가치는 더욱 커졌다.
이집트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 혁명을 본받은 카다피는 전후 질서를 뒤흔들었다.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석유기업을 국유화했을 뿐 아니라, 영국 미국의 군사기지를 폐쇄했다. 또 서구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했다. 국제 테러 배후로 낙인 찍힌 근원이다. 그 때문에 1986년 미국의 공습을 비롯해 국제 제재와 압박에 시달렸다.
그러나 리비아는 카다피 독재 아래 석유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와 복지를 이뤘다. 오랜 경제 봉쇄 속에서도 1인당 GDP는 1만5,000 달러에 이르러 세계은행은'중상층소득경제'로 분류한다. 주택 교육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두드러진다. 그래서 서구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잣대로 카다피의 악덕을 부각시킨 근본은 리비아가'성공 모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지적이 있다.
어쨌든 카다피는 서구와 오랜 불화 끝에 2003년 극적 화해를 했다. 미 여객기 테러 용의자를 넘겨주고 통 큰 보상을 했다. 대량살상무기 계획도 폐기했다. 석유개발 이권도 다시 허용했다. 그 대가로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지난 해까지 우호적 관계를 지속한 사실에 비춰, 서구가 리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감행한 정치적 전략적 동기가 못내 궁금하다.
서구의 무력개입 명분은 리비아 국민 보호이다. 영국 프랑스가 개입을 재촉하고 미국이 짐짓 망설이는 동안, 카다피 군이 반정부세력 거점을 점령하면 민간인 50만 명이 학살 당할 것이란 경고가 잇따랐다. 이 때문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른 제3의 전쟁을 꺼리던 오바마도 마음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서구는 질서변화 원치 않아
그러나 전쟁의 뒤꼍에서 들리는 얘기는 다르다. 서구는 오래 전부터 카다피 정권 약화를 꾀했다. 외교관들을 회유하고, 벵가지 등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의 부족과 군을 상대로 은밀한 공작을 했다. 반정부 시위가 곧장 무장 봉기와 내전 양상으로 치달은 데는 사전공작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소극적 자세도 아랍권의 반감을 고려할 것일 뿐, 실제로는 이집트를 통해 반군을 무장시켰다고 한다. 서구 언론도 벵가지 등의 전투상황과 인명피해를 부풀렸다는 지적이다.
서구가 전쟁을 서두른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 독일의 진보적 권위지 쥐드도이체 차이퉁은 "리비아 공습으로 아랍 혁명은 순수성을 상실했다"고 논평했다. 억눌린 민중의 의지가 분출한 혁명의 정통성이 외세 개입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게 민주화 혁명으로 아랍과 중동의 기존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막으려는 서구의 의도라는 분석이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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