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어린이 10명 중 1명 꼴로 달걀 알레르기가 있다고 한다. 달걀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거나 두드러기가 난다. 심하면 어지럽고 구토까지 한다. 안 먹으면 그만이긴 한데, 예방접종이 문제다. 백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독감바이러스는 보통 달걀에서 대량 배양한다. 그 과정에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성분이 백신에 남는다. 때문에 달걀 알레르기가 있는 어린이가 백신을 맞으면 달걀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될 길이 열렸다. 구원투수는 다름 아닌 방사선이다.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사실 방사선은 오랫동안 인류와 공존해왔다. 방사선 덕분에 인류는 혜택도 많이 누린다.
달걀 알레르기 없는 백신
달걀에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성분은 흰자에 들어 있는 단백질 ‘오발부민’이다. 오발부민이 몸 속에 들어가면 피에 들어 있는 항체(IgE)와 반응한다. 알레르기는 바로 이때 생긴다. 이주운 한국원자력연구원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연구팀은 오발부민에 방사선을 쪼여 구조를 약간 바꿨다. 이렇게 변형된 오발부민이 몸 안에 들어가면 또 다른 항체(IgG)가 이물질로 인식해 공격하게 된다. 실제로 연구팀이 변형된 오발부민이 들어 있는 백신을 실험용 쥐에 주사했더니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구원은 “동물실험으로 안전성을 확인했고, 현재 아주대 의료진과 함께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백신 개발뿐 아니라 방사선이 유용하게 쓰이는 기술은 다양하다. 식물이나 씨앗에 방사선을 쪼이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꽃 색깔이 바뀌거나 병충해에 잘 견디거나 사막에서도 잘 자라는 등 독특한 특성이 새롭게 나타난다. 방사선을 쪼이기 전과 전혀 다른 품종이 되는 것이다. 이때 방사선은 강한 에너지를 전달하면서 통과하기 때문에 식물 몸체에 남지 않는다. 이 같은 방사선육종은 손으로 일일이 암술과 수술을 접붙여야 하는 교배육종보다 시간과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최근에는 방사선육종으로 키가 50cm 정도인 신품종 무궁화도 나왔다. ‘꼬마’라고 이름 붙은 이 무궁화는 실내 화분에서도 가꿀 수 있다.
녹차 추출물을 넣은 화장품도 방사선의 작품이다. 녹차 추출물을 그대로 화장품에 담으면 녹차 속 엽록소가 공기나 물과 닿아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화장품 색이 검게 변하고 불쾌한 냄새도 난다. 방사선을 이용하면 녹차 추출물에서 엽록소만 골라 파괴할 수 있다.
식품 제조과정 중 멸균처리 할 때 역시 방사선이 유용하다. 특히 식품이 발효되는 동안 미생물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자라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발효가 지나치게 진행돼 식품의 맛과 색이 변질되기 쉽다. 이 같은 이상발효를 막기 위해 과거엔 열을 가했다. 그러나 가열하면 영양성분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 대신 방사선을 쪼이면 영양성분은 지키면서 불필요한 미생물은 없앨 수 있다.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 때는 잿더미에 방사선을 쪼여 뼈와 치아 조각을 찾아내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X선으로 뼈를 찍어 골절 여부를 진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암 치료에도 방사선은 이미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수단이 돼 있다.
이온화방사선이 문제
방사선(放射線)은 말 그대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빛이다. 햇빛도 방사선이다. 전자레인지에서 나오는 전자파 역시 방사선이다. 방사선이라고 무조건 해롭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러 가지 방사선 가운데 다른 물질을 이온화시키는 게 있다. 이 같은 이온화방사선이 몸에 해롭다. 중성인 분자나 원자에서 전자를 빼앗거나 더하면서(이온화) 상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온화방사선이 몸에 닿으면 세포가 손상되고 조직이 파괴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햇빛이나 전자파는 다른 물질을 이온화시키지 못한다.
이온화방사선도 알파선과 베타선(전자선) 감마선 X선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이 가운데 에너지가 커 다른 물질과 가장 활발히 반응하는 게 베타선이다.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로 이뤄져 있어 전자선이라고도 불린다. 감마선과 X선은 베타선보다 에너지는 좀 떨어지지만 투과력이 좋다. 특히 감마선은 두꺼운 납판까지 투과한다. 알파선은 에너지는 크지만 입자로 이뤄져 있어 종이도 뚫지 못할 정도로 투과력이 크게 떨어진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누출된 세슘이나 우라늄 같은 방사성원소는 주로 감마선과 베타선을 낸다. 자연계에 있는 보통 원소는 같은 수의 양성자와 중성자를 갖고 있다. 하지만 원전에서 일어나는 핵분열반응으로 생성된 인공 방사성원소는 양성자와 중성자 비율이 다르다. 이런 원소들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때문에 되도록 안정 상태로 변화하려고 스스로 계속 분열한다. 이 과정에서 방사선이 나온다.
원전 사고에서 나오는 방사선 가운데 인체에 가장 위험한 건 감마선이다. 투과력이 뛰어나 여러 장기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종이나 멸균 등에 쓰이는 방사선도 감마선이 많다. 단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소량만 쓴다. 감마선은 태양도 낸다. 가끔 감마선 폭발까지 일어난다. 태양이 평생 내놓는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단 몇 초에서 몇 분만에 한꺼번에 분출하는 현상이다. 그 에너지량은 원자폭탄을 매일 1,000조개씩 30조년간 터뜨릴 때 나오는 정도니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흑점 폭발로 나오는 에너지보다 100만~1조 배나 강하다. 과학자들은 감마선 폭발을 ‘작은 빅뱅’이라고도 부른다.
담배에도 방사성원소가
방사성원소는 자연계에도 원래 존재한다. 우리가 평소에도 항상 방사선을 맞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건강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다. 자연 방사성원소는 인공 방사성원소보다 대부분 반감기가 훨씬 길다. 스스로 분열하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 자연계에 있는 루비듐-87은 약 600억년이 지나야 반으로 줄지만, 발전소에서 생기는 루비듐-90은 3분쯤 지나면 절반이 된다. 결국 자연계에서 방사선이 더 오랫동안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은 이유는 원전에서처럼 다량의 방사선원소가 한데 뭉쳐 있지 않고 워낙 소량씩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 방사성원소가 내는 방사선은 공기 중에 떠다니다 우리 몸 속에 들어오기도 하고, 산업현장으로 가 제품 속에 침투하기도 한다. 진정일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시멘트나 바위에 들어 있는 방사성원소 라돈이 끊임없이 방사선을 내기 때문에 특히 지하실처럼 밀폐된 공간에선 자주 환기를 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방사성원소 칼륨-40을 몸에 지니고 있다. 진 교수는 “몸무게가 60kg이면 몸에 들어 있는 칼륨이 약 200g인데, 이 중 약 20mg이 방사성원소”라고 설명했다. 담배에는 방사성원소 폴로늄-210이 들어 있다.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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